13. Terme di Saturnia, Pitigliano
토스카나의 유명한 노천온천인 사투르니아 온천(Terme di Saturnia)으로 가는 길은 도로 양옆으로 펼쳐진 너른 들판과 사이프러스 나무들로 전형적인 토스카나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코스다. 이런 풍경 덕분에 토스카나에서는 그저 차로 달리며 도로 주변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우리는 쭉쭉 달리며 토스카나를 거의 통과해 가는 중이었다.
뜨거운 햇볕이 쏟아지는 한낮, 언덕 위 사투르니아 마을에 도착해서 좁은 무료주차장에 겨우 차를 세웠다. 날이 너무 더웠지만 참치캔은 너무 물려서 점심으로 컵라면을 먹었다. 마트에 들르지 못하거나 전기를 쓸 수 없을 때는 거의 컵라면이 아니면 익힌 야채가 들어 있는 참치샐러드캔으로 식사를 때운다. 이탈리아는 외식비가 비싸서 가끔씩만 사 먹는다 해도 식비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번거롭게 가계부를 쓰지 않는 대신에 모든 순간 최선을 다해서 절약을 생활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돈을 아끼는 가장 좋은 방법은 웬만한 일은 몸으로 때우는 것이기 때문에 이번에도 우리는 온천에서 가까운 캠핑장 대신에 꽤 멀리 떨어진 무료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자전거를 타고 가기로 했다. 그런데 돈을 아낀 대가는 생각보다 컸다. 마을에 있는 주차장에서 온천이 너무 멀고 길 상태가 안 좋았던 것이다. 길은 두 가지 선택지가 있는데, 마을 뒤편으로 펼쳐진 들판들 사이로 난 비포장길을 이용하는 것과 마을 앞으로 내려가는 도로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마을이 언덕 위에 있어서 두 경우 모두 경사가 심했다. 경사와 커브 때문에 차가 다니는 도로는 위험하다고 생각한 남편이 비포장길로 가 보자고 했다.
마을 뒤편으로 자전거를 끌고 가 보니 이 길은 트랙터들이 지나다니는, 곳곳이 움푹 파이고 돌이 깔려 있는 험한 길이었다. 각지고 큼직큼직한 돌들이 대충 깔려 있어 걷기도 쉽지 않은 데다가 경사도 심해서 자전거로 가기는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되돌아가면 시간을 많이 지체하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여기까지 온 거 가 보자 하고 힘들게 자전거를 끌고 내려갔다. 그런데 한참 가는 중에 갑자기 멈춰 서서 구글맵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남편..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무슨 일이냐는 물음에도 대답 없이 휴대폰만 들여다 보던 남편의 입에서 한참 만에 나온 말.
"이 길이 아닌 것 같은데.."
아.. 그 말은 방금 한참 걸려 힘들게 내려온 뾰족한 돌투성이 길을, 자전거를 끌고 다시 올라가 그 옆에 있었던 다른 길로 내려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늘 한 점 없는 길에서 힘들어 죽겠는데, 짜증이 솟구쳐 올랐다. 온천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온천을 포기한다 해도 이 길을 올라가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라서, 별 수 없이 꾸역꾸역 오르막길을 다 올라간 후 그 옆길로 내려갔다. 내려가다 보니 이번에는 포장된 길이 나왔고 그 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달려 드디어 사투르니아 온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온천 바로 근처에는 캠핑장이 있어서 캠핑카들이 여럿 주차되어 있었다. 캠핑장 비용 몇 만 원을 아끼려고 우리가 한 고생을 생각하니 헛웃음이 났다. 게다가 캠핑카가 있는 마을로 돌아가야 하니 고생은 아직 반도 안 끝난 거였다. 거칠게 깨진 큼직큼직한 돌들이 깔려 있는 오르막길을 자전거를 끌며 걷는 것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돌아올 때는 차가 다니는 도로로 왔는데, 이 코스도 쉬운 코스가 아니었다. 언덕을 빙빙 돌아서 올라가는, 계속 경사가 심한 오르막인 데다가 갓길이 없는 도로라서 도로변에 바짝 붙어서 뒤를 계속 확인하며 한 시간을 넘게 자전거를 끌고 올라와야 했다. 지금도 사투르니아를 생각하면 땡볕에 죽을 힘을 다해 자전거를 끌었던 기억이 먼저 떠올라 고개를 젓게 된다.
그렇게 힘들게 다녀온 사투르니아 온천은 듣던 대로 예쁘긴 했다. 물 색깔이 인터넷에서 보던 것보다는 연하고 온도도 약간 미지근한 느낌이었지만 유황 냄새가 나는 뽀얀 하늘색 물이 신기하고 예뻤다. 그런데 반신욕 하듯 앉아 가만히 물속을 들여다 보다가 꼬물거리는 빨간 실 같은 게 눈에 띄어 소름이 쫙 끼쳐 버렸다. 실지렁이였다. 머리카락처럼 가늘고 길이도 짧지만 너무나 선명한 빨간색이라 뽀얀 물속에서 도드라져 보였다. 한번 인식하고 나니 뻘에 박혀 있거나 꿈틀거리며 떠내려가는 수많은 실지렁이들이 보여 비위가 상하고 말았다. 심지어 수영복 안에도 다 들어가서, 나중에 차로 돌아와서 수영복을 벗었더니 아.. 이 장면은 차마 묘사할 수 없어 상상에 맡긴다.
그래도 참 예뻤던 사투르니아 온천.
캠핑카로 돌아와 남은 힘을 짜내어 물티슈로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고 이제 어디로 갈까 고민하는데 시에나, 아스티, 몬테풀차노.. 토스카나에 아직 가 보고 싶은 곳이 너무 많았다. 다 가 보려다가는 여행을 토스카나에서 마치게 될 지경이었다. 날씨도 너무 더워져서 빨리 남쪽 바다로 내려가야 할 것 같은데 우리는 아직 중간까지도 내려가지 못한 상태였다.
고민 끝에 몇 곳은 돌아오는 길에 시간이 있으면 들르기로 하고 이쯤 해서 라치오 주로 내려갈 결심을 했다. 토스카나를 벗어나기 전 피틸리아노(Pitigliano)에 있는 마트 주차장에서 하루 자고, 일어나자마자 미련 없이 라치오 주로 바로 넘어가자 생각한 우리는 내비게이션에 피틸리아노를 찍고 달렸다.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길을 따라가다 보니 난데없이 급커브 구간이 연속으로 있는 내리막길이 나왔다. 낡은 캠핑카인 우리 차로 괜찮을까 불안해하며 산길의 가파른 S자 도로를 조심조심 내려가는데 문득 저 앞에 절벽 위로 불쑥 솟아오른 도시가 보이는 게 아닌가? 저게 뭐야 싶은 순간 마침 길 옆에 주차를 할 수 있는 공터가 나타나 남편이 급하게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려 찬찬히 보니 더욱 장관이었다. 절벽과 건물이 마치 자연적으로 이어진 것처럼, 혹은 거대한 암석을 깎아 도시를 만든 것처럼 보였다. 그 규모도 커서 정말 입이 떡 벌어졌다. 도대체 저게 뭐냐며 넋을 놓고 보다가 이윽고 그곳이 피틸리아노라는 것을 깨달았다. 잠만 자고 갈 곳이라 알아보지도 않고 별 기대도 안 했는데 이런 곳이었다니. 그 도로의 계속되는 급커브는 아무래도 우리 차에 무리인 것 같아 공터에서 차를 돌려 되돌아가서 다른 넓은 길로 피틸리아노에 들어갔다.
다리를 건너 우리가 들어간 쪽은 구시가지와는 떨어져 있어서 보통의 도시와 다르지 않았고, 우리는 계획대로 마트에서 장을 보고 주차장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아침 일찍 그곳을 떠났다. 그런데도 내내 두근거리는 마음이었다. 전날의 마법 같은 순간이 남긴 여운 때문이었을 것이다. 세상이 여기 이런 것도 있는데, 하며 슬쩍 보여 주는 이런 멋진 장면들을 무심코 발견할 때 우리는 그저 풍경이 아닌,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듯한 기쁨을 느끼게 된다. 이런 순간들을 계속해서 발견해 나가는 것이 캠핑카 여행의 진정한 묘미가 아닐까. 눈앞에 이 멋진 도시가 나타나던 그 순간을 나는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