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리타 도자기 축제를 보러 왔다는 간단한 소개를 했다. 아쉽게도 그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이름 모를 안내자를 따라 기차표를 끊었고, 나중에 하카타로 돌아오면 연락을 달라는 인사와 함께 그와 헤어졌다.
일본인은 본래 이렇게 호의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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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이삼평(李參平), 이곳에선 나를 도조(陶祖)라 부른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조선 땅에서 왕실 도자기를 만들던 도공이었다. 갑작스러운 왜란 중에 먼 이곳까지 끌려왔지만, 내 기술을 알아본 이들이 있어 별 어려움 없이 지낸다.
얼마 전, 앞 산에 백토가 무더기로 발견되었다던데, 아마도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가 아닐까 싶다.
사람 사는 곳은 다 같은 것 아니겠는가?
내가 가진 기술로 사람들이 편하게 살 수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상관없을 듯싶다.
고향이 그립긴 하지만, 이곳에서 뜻이 맞는 사람들과 지내다 보면 언젠가 이곳도 고향같아지겠지.
이삼평 - 조선시대 광주관요 사기장, 임진왜란에 규슈 사가현으로 납치되어 아리타에 정착. 이후 그 지역을 도향(陶鄕)으로 만든 인물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으니, 흔쾌히 된다고들 했다.
나는 도예를 전공하는 학생이며, 한국에서 왔다는 말을 건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를 반갑게 대해 주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뭔가 친근한 느낌이 가득했다.
자신의 집 담벼락에 즐비하게 놓인 도자기가 정겹기만 하다. 그 중 하나가 우리집에서 20년째 산다.
아리타는 규슈 사가현에서도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지명조차 없던 곳이었는데, 조선에서 온 도공들을 중심으로 가마가 세워지고, 마을에서 나는 양질의 백토로 백자를 본격적으로 생산하게 된다. 이후 번창하여 일본 내에서도 도자기를 생산하는 곳으로 유명해지며, 인근 이마리 항(港)을 중심으로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지게 된다.
지금도 아리타는 유명한 도자기 생산지이며, 매년 3월 말에 도자기 축제와 함께, 이삼평을 기리는 행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윤용이 선생님 책을 천천히 다시 읽어본다.
'아리타 외산의 한 구릉 위에 조선 무명 도공들을 기리는 비(碑)들을 보니, 지금의 아리타 자기가 있기까지 애써온 조선 도공들의 발자취는 보는 것 같아 숙연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들은 스스로를 이삼평의 후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때는 그저 여행을 간다는 기분이었지만, 다시 찾게 되면 나 역시 숙연한 기분이 들 것 같다. 기회가 되면 선배들의 비에 술이라도 한 잔 올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