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시온 Oct 09. 2017

군에서 얻은 4가지 비유, 그 두 번째

물방울 고문

# 소위 시절 에피소드


갓 전입한 소위 시절 겪었던 이야기다.

자대 배치를 신병교육대로 받았고,

중대에는 여군 동기가 한 명 있었다.

특별히 모난 점 없이 성실한 친구였다.


당시는 8월 중순쯤이었던 것 같다.

업무를 보는 간부연구실에는 에어컨이 없어서

찌는 듯한 더위로 고생했던 것으로 기억다.


군 생활을 돌이켜보면 이때가 정말 힘들었다.

물론 더위 때문은 아니었다.

정신적으로 많이 힘든 시기였다.


무엇이 그리도 힘들었을까?


선배의 질책? 역량 부족? 새로운 환경?

아니었다.

동기의 "배고파"라는 말이 너무 힘들었다.


어이가 없을 수도 있다. 우습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을 끝까지 읽어본다면 필자에게 공감할 수 있으리라.

당신이 느낀 그 가벼움이 이 글의 핵심을 관통하는 포인다.


물방울 고문이란 부제의 에피소드다.



# 문제의 시작


문제적 인물은 간부연구실에서 바로 필자의 옆자리에 앉았다.

음, 사실 '문제적' 인이라는 표현은 객관적으로 어폐다.


이는 분명히 밝혀두어야 하는 점이다.

여군 동기는 누가 봐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잘 웃고, 싹싹하고, 싫은 내색도 잘 안 내는 긍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전입 초 초임장교는 얼마 동안 수습기간이라 하여 교육에 투입되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교육을 주관하는 간부 옆에서 관찰, 기록, 공유를 하

신병교육 체계가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하나하나 터득해 나가는 시간이었다.

그 외에도 갖가지 초임장교로서 파악해야 하는 업무가 많았기 때문에

필자와 동기는 야간이고 주말이고 한 동안 내내 같이 붙어 다녔다.


시작은 별 거 아니었다.

정확한 시작은 기억해낼 수 없다.

일상 속에 이루어지는 너무나도 평범한 대화였기 때문이다.

식사시간 직전에 한 말이었는지, 야근 중 정적을 깨고 한 말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것이다.

"배고파"

필자는 아마도 때마침 서랍에 쟁여놨던 먹을 것을 건네주었을 것이다.


동기의 한 숨과 동시에 나오는 "배고파"란 소리.

간헐적으반복되었지만 필자는 의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임계치를 넘어, 문득 이 친구가 상당히 배고파란 말을 꽤나 자주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마치 파브르가 된 기분이었다.

우연히 신종을 발견한 곤충 과학자가 이후 스치는 작은 벌레에도 동그랗게 눈을 뜨고 다니는 것처럼,

동기에 입에서 배고파란 말이 나올 때마다 묘하게 신경이 집중되었다.


아침 일찍 출근을 하고 업무를 준비하는데

"배고파"

오늘 아침을 잘 챙겨 먹지 못했나 보다 생각했다.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배고파"

매점에 가라고 짧게 말해주었다.


한 번은 같이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오자마자

"배고파"

농담인가 긴가민가하면서도 농담같이 들리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 잊을만하면 또

"배고파"

말없이 간부연구실을 빠져나온  있다.



# 문제의 절정


대충 한 달쯤이 지난 시점에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냥 냅다 화를 낼까, 동기를 붙잡고 진지하게 얘기를 할까 고민도 했다.

근데 막상 그러려니 모양새가 우스울 것 같았다.


한 번 상상을 해보았다.


동기의 입에서 배고파란 말이 나오자마자 눈을 부릎뜨며,


'야! 내 앞에서 제발 배고파란 얘기 좀 하지 마. 정말 짜증 난다고!'


상상력이 빚어낸 연출에 혼자 고개를 내저었다.

이것은 참으로 소인배의 대사가 아닌가.

사소한 것에 예민하게도 군다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을 것 같았다.


혹은 차분하게 대화를 시도한다 해도 왠지 모를 찌질함은 가시지 않을 것 같았다.

필자의 심각한 표정과 대화의 소재는 완벽한 미스매치였다.



# 우연과의 조우


우연하게도 그 시점에서 한 글을 접한다.

중국 형벌에 관한 글이었다. 어느 블로그에서 읽었던 것 같은데 정확한 출처는 기억나지 않는다.


중국은 역사가 길고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했던 만큼 형벌의 종류도 다양했다. 형벌이 잔인하면 잔인할수록 백성들에게 공권력의 존재는 더욱 또렷이 각인될 따름이었다. 대륙의 엄청난 인구수는 시대를 막론하고 사회질서와 치안유지의 소요를 크게 증대시켰다. 중국의 형벌 제도 발달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사극에서 흔히 접하는 주리 틀기. 이 주리의 기원도 사실 중국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리는 주뢰(周牢)의 언어적 변형으로, 중국 주나라의 감옥에서 행해졌던 고문 기법이었다. 주나라의 제5대 왕이었던 목왕은 그의 명으로 『여형(呂刑)』이라는 최초의 성문화 된 형법(刑書)을 발간하기도 했다. 이 형서에는 오형(五刑)이라 하여 다섯 가지 형벌을 소개한다. 강제로 얼굴에 문신을 세기는 묵형, 코를 베는 의형, 발뒤꿈치나 무릎뼈를 잘라내는 비형, 생식기를 제거하는 궁형, 그리고 마지막 사형이다. 이 중 궁형은 『사기』의 저 사마천이 받았던 형벌로 잘 알려져 있다. 사마천은 주나라 역사가 가문의 후손이었다고 하니 역사의 기묘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오형 외에도 여러 가지 기상천외한 형벌들이 존재했다. 며칠에 걸쳐 죄인의 살을 조금씩 포를 떠 죽이는 능지형, 소나 말에 목과 사지를 각각 매달아 찢어 죽이는 거열형, 가마솥에 넣어 삶아 죽이는 팽형 등 모두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방법들이다.


중국의 여러 기상천외한 형벌들 중,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은 무엇일까?


필자가 읽었던 블로그 글에서 제시한 답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중국식 물고문(일명 물방울 고문)'이었다.



# 중국식 물고문


중국식 물고문은 다음과 같은 절차를 따라 실행된다.


① 죄수를 눕힌다.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게 완전히 속박시킨다.

③ 죄수의 머리 위에 물을 가득 채운 양동이를 둔다.

④ 양동이 바닥에 조그만 구멍을 뚫는다. 1~2초 간격으로 딱 한 방울 씩만 떨어지도록.

⑤ 이때 물방울이 떨어지는 위치가 중요하다. 죄수의 미간 정 가운데 떨어지도록 양동이 위치를 조정하자.

⑥ 끝. 양동이에 물이 다 떨어질 때쯤 와서 물만 잘 채워주면 된다.


아래 영상은 디스커버리 채널의 한 프로그램에서 실제로 실험을 한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17DhRkeNJMY

출처 : 디스커버리 채널 MythBusters


피가 단 한 방울도 튀기지 않는다. 격렬한 움직임도 없다. 어떠한 폭력성도 관찰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가장 높은 수준의 고통을 호소하게 만드는 고문이라고 한다.


처음에 죄수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단순히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죄수는 점점 고통을 호소하게 된다.


영상 속 여성 피실험자는 불과 한 시간만에 울음을 터뜨린다.

결국 실험은 한 시간 반 만에 안전관리자의 개입으로 중단되었다.


실제 고문은 며칠에 걸쳐 진행되도록 설계된다.

처음에는 간지러운 정도의 수준일 것이나,

나중 가서는 물방울 하나하나가 힘껏 내리치는 도끼보다도 더 아프게 느껴진다고 한다.


결국 끝에 가서 죄수는 미쳐버리고 만다.



# 경탄과 깨달음


물방울 고문이라는 소재를 접했을 때 경탄을 금치 못했다.


고통이라는 측면에서 이 고문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주장을,

과학적 데이터와 구체적인 근거 부족을 이유로 유보한다고 치자.


그러나 그 효율성에 관해서는 반론의 여지가 없었다.


인간의 실험정신과 악마적 상상력이 나은 결과물이랄까?

영혼마저 팔아버린 고문 개발자의 손에 악마는 끝내 양동이 하나를 쥐어준 셈이다.


그리고 그 양동이 바닥에 구멍을 낸 것은 단순한 바늘만이 아닌,

인간의 근본적인 약점은 육체가 아닌 심리에 있다는 것을 꿰뚫어 본 통찰력이었으리라.



글을 다 읽고, 순간 이마가 찌릿해지는 깨달음이 왔다.


그렇다!


물방울!


'배고파'라는 물방울!


근래에 왜 그렇게나 짜증 났었는지 힘들었는지가 드디어 납득되었다.

나는 물방울 고문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 물방울 고문을 못 버틴 여자, 버틴 남자


위 영상의 실험에서 제시된 바, 물방울 고문의 핵심 변수는 '속박'이다.


영상 속 여성 피실험자는 불과 한 시간 반 만에 실험 중지가 선언되었던 반면,

남성 피실험자는 세 시간 반이 넘게 물방울 고문을 견딜 수 있었다.


움직이지 못한다는 설정은 둘 다 같았다.

그러나 남성 피실험자의 경우 어떠한 속박 도구도 없었다.


정확히 말해서 남성 피실험자는 움직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움직이지 않은 것이었다.

그것이 결정적인 차이였다. 즉 차이는 '자기통제력의 유무'였다.

 


# 현대인에게 물방울 고문


생존을 위해 스스로를 일의 굴레에 속박시키는 대다수의 현대인에게 물방울은 치명적이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같은 곳, 같은 사람, 같은 상황을 두고 맞게 되는 같은 물방울.

물방울이란 일상적인 대화의 한 문장일 수도, 순간의 표정일 수도, 간단한 행동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지 못하는 상황에서 나에게로 스며드는 물방울들은

언젠간 분명 도끼보다도 날카롭게 느껴질 것들이다.


물론 고개를 돌리는 일은 차선책이다.

얼른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야말로 최선책일 것이다.


본인의 삶에서 자기통제력을 가질 수 있느냐. 가장 중요한 문제다.


이를 위한 방책에 대해 논하자면,

조직의 권한부여(empowerment)가 상책,

스스로에 대한 동기부여가 중책,

과감한 회피나 일탈이 하책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여전히, 방책의 상중하를 떠나서 자기통제력을 갖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환경에 독립적이기보다는 종속적인 존재라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 물방울일 수 있다, 당신도, 나도


물방울 고문이 더욱 치명적인 이유는 한 가지 더 있다.

물방울을 튀기는 사람은 본인이 물방울을 튀기는지 모른다는 점이다.


왜냐면 물방울이기 때문이다.


이 말인 즉, 누구나

심지어 나도

얼마든지 구멍 난 양동이일 수 있다는 말이다.


앞서 언급한 여군 동기는 '배고파'라는 말에

필자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었을지 아마 상상도 못 하였을 것이다.



# 내가 집행한 물방울 고문


필자도 마찬가지로, 상상치도 못한 실책 경험이 있다.


전입 2년 차 본부중대장 시절, 타부대에서 전출당해 온 부하가 있었다.

그런 부류의 친구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잘하도록 관심을 갖는 것은 지휘관의 역할 중 하나이다.


적응을 잘 못할 것이라는 우려와 달리 부하는 매사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여 필자는 고마운 마음에 가끔 마주칠 때마다 부하에게 일을 잘한다고 칭찬과 격려를 해주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별도의 사건으로 인해 해당 부하를 징계하는 과정에서, 면담 간 아주 뜻밖에 말을 듣는다.

부하는 필자에게 평소 본인을 '일만 하는 존재, 일꾼 정도'로 생각하지 않냐고 쏘아붙여 얘기한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화가 나기보다는 아차 싶었다.

'일을 잘하고 있다'라는 필자의 반복된 말이 그 친구에게는 물방울이었겠구나, 생각했다.


이 일은 심지어 물방울 고문 비유를 얻고 난 이후에 벌어진 일이다.

함부로 물방울을 튀기지 않도록 삼가야지 수십 번 수백 번 스스로를 다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물방울이기 때문이다.    



물방울 고문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떻게 하면 물방울을 튀기지 않을 수 있을까?


필자가 찾은 유일한 해결책은 다음과 같다. 직접 물어봐야 한다. 그 외에는 답이 없다.


경계심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물방울은 물방울임을, 그 가벼움을 기억해야 한다.


상대방에게 평소 자신의 언어, 말투, 행동 등 언행의 습관 중

고쳐야 할 점이 있지 않느냐 수시로 묻는 수밖에 없다.


자주 마주치는 사람일수록, 반복되는 일상을 함께 공유하는 사람일수록, 물어봐야 한다.

특히 가족과 직장동료에게 이러한 질문은 매우 유효하다.


타인은 자신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다.

진정성 있는 자세로 상대에게 먼저 다가가면 명료한 거울 속에 비친 구멍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미쳐보지도 생각지도 못한 자신의 바닥에 뚫린 그 작은 구멍 말이다.



# 이 문제의 결말


참, 그 여군 동기와는 어떻게 되었냐고?

유레카의 그 날 이후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가끔 동기가 '배고파'란 말을 꺼낼 때면 물방울 고문에 대해 골똘히 생각을 하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슬쩍 고개를 돌린 셈이었다.


그 횟수가 몇 번 안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동기의 배고프단 투정도 완전히 사라졌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동기의 배고픔은 실제 배고픔이 아니었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복합적인 심리적 갈증의 호소가 아니었을까?


어쩌면 필자가 줘야 했었을 것은 몇 입의 과자나 매점에 가라는 핀잔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 한 마디면 배고프단 말이 싹 사라지지 않았을까,

이제 와서 문득 상상을 해본다.

작가의 이전글 군에서 얻은 4가지 비유, 그 첫 번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