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종교인이라는 이름이 불편할까.
매일 출근해서 자리에 앉으면 저 건너편에서 성경필사를 열심히 하고 계시는 분이 계신다. 오늘 어쩌다 대화를 나누게 됐는데, 사실 대화라긴보다 거의 강론(?)이었다. 그는 독실한 천주교인이었다. 회사 대표의 운전기사라는 그는 갑자기 주섬주섬 폰을 꺼내더니 대표님에게 매일 아침마다 받는 성경 말씀을 나에게 낭독했다. (대표님도 꽤나 신실하신가 보다.) 다소 불운(?)하게도 그의 말은 낭독에서 끝나지 않았고, 그는 그 말씀에 담긴 감격과 들뜸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본래 흥미가 생기지 않는 이야기에 집중을 포기하는 습관을 갖고 있어서 그의 언어는 내 귀를 이미 떠난 지 오래였고, 그의 벅찬 감정만 나에게 잔잔히 느껴질 뿐이었다. 그는 그렇게 기분 좋게 웃으면서 일요일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자녀들과 주말만큼은 같이 성당에 가서 십자가 앞에서 일렬로 앉아 있을 때 그렇게 좋다고 말한다. 아, 그래요 좋으시겠어요. 하면서 나는 어느 순간 종교이야기만 나오면 전혀 심취하지 못하고 시큰둥해진 나 스스로를 또 발견한다.
어려서부터 태어날 때부터 모태신앙. 자아를 의식하기 전부터 나는 "요안나"였다. 한때는 내가 종교를 믿어서, 신을 믿어서 너무 다행이라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다. 성당에서 만난 어른들은 나이스했고, 그냥 기도문을 외우고 성호경을 긋는 것만으로도 꽤 자긍심을 가지기도 했다. 그런 자긍심이라도 지금 남아 있으면 얼마나 간단하고 좋으련만.
나의 불경한 냉담의 역사를 되짚어본다면 나는 어느 순간 타인을 무척이나 의식한 뒤로 종교인이라는 명칭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어떤 프레임을 씌우는 것 같았다. 그저 종교가 있다고 말하는 것에서 확장되어 "나는 종교에 매우 미쳐있어요."의 의미를 담는 것 같아서. 굉장히 고리타분하고 앞뒤 안 가리고 신앙에 대해 떠들 것만 같다는 그런 고정된 상을 만들고 그렇다 믿고 있었다. 사실 나만 탓할 수는 없는 게, 사회에서도 사이비가 흥행하고 이젠 신천지도 더 이상 비밀리에 숨어 있지 않으니까. 종교를 갖는다는 것은 일종의 비합리적이고 불가항력적인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것 아닌가. 누구든지 누군가에게 비합리적이고 고집만 센 인간으로는 보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보고 교회 다니냐는 말만 하면 화들짝 놀라며 부정하고, "아, 성당 다녀요." (사실 천주교회이다. 교회는 교회지.) 라 겨우 말을 한다든지 아니면 그냥 답변을 피하기도 했다. 난 불순한 사람인지 아직 신앙에 대해 툭 터놓고 말하는 건 너무 어렵다. 나를 크레이지 크리스천으로 보는 건 죽어도 싫다. 그냥 잔잔하게 종교라는 울타리 안에 오래 옆에 머물고 싶다는 마음이지 정말 "온몸을 바쳐 주님을 사랑하는" 그런 신앙은 솔직히 못 갖겠다.
그래도 운전기사님의 건강한 정신과 삶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신앙이 큰 작용을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정말 신앙은 말이 참으로 저렴하지만 셀프인 것을.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선에게 응답하고, 가능한 선의 믿음을 가지면 된다고 생각한다. (평소의 삶과 사과방식은 거의 무신론자의 가까운 삶이지만.) 그저 지금은 알레르기처럼 종교 이야기만 하면 그냥 화들짝 놀라서 내가 불순하게 보일지, 혹은 너무 독실하게 보일지 걱정하는 것에서는 벗어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