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서른고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와아오 Jul 20. 2022

7년 만에 만난 옛 애인이 보여준 내 모습

나는 네 번의 연애를 했다. 그중에서 두 번째, 2015년에 헤어졌던 그를 7년 만에 만났다. K는 지하철로 고작 15분 거리에 살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지하철에 내려 "거의 다 왔어"라고 문자를 보내자, 답장 대신 신호등 앞에서 K가 손을 흔들었다.


부스스한 머리, 츄리닝 반바지에 슬리퍼. 역시 그런 꾸미지 않은 모습이 잘 어울리는 K였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그런 사람을 좋아하는 구석이 있다.) 7년 만에 만나 입을 뗀 첫마디는 잘 지냈냐도 아니고, 배고프냐도 아니었다. "치킨 포장해 가자"


거추장스러운 인사는 비즈니스 식 악수 한 번으로 마치고, 치킨을 기다렸다. 어떤 거 먹을래? 그런 당연한 질문조차 하지 않고, 구운 치킨을 당연스럽게 주문했다. 튀긴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 이 생각이 내 머릿속에도, K의 머릿속에도 똑같이 박혀있나 보다.


K의 집에 들어가 와인을 선물했다. 만나기 전, 요새 와인을 즐겨마신다는 얘기에 부랴부랴 잠실 와인벙커에 들러 MD's Pick을 골랐다. 맛이 없으면 어쩌지, 와인 고수에게 햇병아리가 심사를 받는 느낌이었다. 다행히도 꽤 괜찮았는데, 우리는 맛에 취해 와인을 세 병이나 땄다.


맥주 네 캔을 더 마시면서 시계를 보니 일곱 시간이 흘렀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했을까. 7년 사이 어떻게 지내왔는지부터 시작해, 우리가 만나고 있을 때 서로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가족들은 다 잘 지내시는지, 그런 주제로 대화를 시작했다.


그때는 둘 다 20대였으므로, 어렸다. 어렸기 때문에 발산했던 패기와 자신감. 말도 안 되게 휘황찬란한 포부. K는 나의 그런 모습이 조금 웃기기도 했었다고. 하지만 그게 또 매력이 되어 처음으로 연하를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내가 K에게 첫 연하라니. 괜히 그런 의미 없는 의미를 붙였다.


가장 재밌던 얘기는 뭐니 뭐니 해도 연애나 이상형에 관한 것이었다. <탑건1>에서 톰 크루즈를 보고 지구가 멈춘 느낌이었다느니, 그래도 가장 완벽한 이상형은 톰 홀랜드라느니. 일부는 동의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나도 Tom으로 개명할까 잠깐 고민을 했다.


최근에 만난 사람에게 호감이 가지만 선을 지키고 있다는 얘기, 어느 친구가 그동안 쌓은 커리어를 포기하고 영국으로 디자인 공부를 떠났다는 얘기, 그런 일상 대화를 나누다가 어느 대목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말하자, 손을 잡아주며 늦게나마 위로해주는 K. 한동안 손이 따뜻했다.


그렇게 일곱 시간을 입으로 달리며, 공감능력을 한껏 펼치고 보니 우리는 각자 스스로를 잘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렇게 유치했었나, 해맑은 표정이 있구나, 어떤 말은 기억도 나지 않는데 상대에게는 잊지 못할 대사가 되어 있었다.


아마 종종 K에게 와인을 배울 듯하다. 모르는 모습이 있었듯, 먹어보지 못한 것, 가보지 못한 곳이 너무 많다. 물며 닭무침이라는 음식은 이틀 전에 처음 들어보지 않았나! 각자가 다음 만남에 더 진솔하기 위해, 모르던 것들을 알려줘야지.

매거진의 이전글 4년 만에 연체했던 카드사의 VIP가 됐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