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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동회 Nov 12. 2023

도동서원

개비리길 비슬산

단풍을 보겠다고 아산과 천안으로 행차(?)했는데요

늦더위에 나뭇잎은 물들지도 못한  시들어 버렸군요


상심한 차에

카카오스토리에서 작년의 도동서원 은행나무 단풍을 리마인드 해 주었습니다

닭대신 꿩이네요


서원 2개의 글을 조합했습니다



#도동서원

#개비리길


작년 봄,

비슬산을 오른 후 도동서원을 답사한 적이 있습니다


은행잎이 황금으로 빛날 때 다시 오마 했었는데 비가 온다는 예보와 주일의 시제 때문에 장거리 출타는 곤란하겠다고 생각하던 차 문득 도동서원이 떠 올랐습니다


며칠 전, 창녕 출신의 직장 선배님이 남지에 있는 개비리길을 걸어보라 추천하셔서 겸사겸사

도동서원의 은행잎도 보고 낙동강변의 늦가을 정취를 맛보고자 길을 나섰습니다



도동서원은 어느 모로 보나 내, 외적으로 우리나라 서원의 백미에 속합니다


하드웨어는 가지런히 정돈된 건물의 배치와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의 외형이 그만이고요


소프트웨어는 우리나라 유교의 메카이며 성리학 계보의 큰 획을 그은 김굉필 선생을 배향했기 때문일 겁니다


Link ; https://story.kakao.com/_eTZCf4/F5R4Onj2Rv0


링크가 작동하지 않아 전문을 복사하여 올립니다

아래 글은 Link에 담긴 글입니다


♤♤♤♤♤♤♤♤♤♤♤♤♤♤♤


 #비슬산과 도동서원


년 중 행사처럼 요맘때면 비슬산을 찾았는데요


올해는 겨울이 따뜻해서 그런지 꽃들의 개화시기가 거의 1주일 이상 빨라진 것 같습니다


비슬산 군락지도 예년 같았으면 12일 후인 4월 22일쯤 만개(滿開) 되어야 하는데

10일 현재 10,000개는 아니지만 8,000개쯤은 개화한 것 같습니다 ㅎㅎ


원래는

11일 화왕산

17일 비슬산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화왕산은 이미 끝나 버렸고

비슬산도 1주일 앞당겨서 탐방하네요


유가사에 주차하고

대견사

대견봉

참꽃 군락지

천왕봉을 지나 원점에 닿았습니다



♧ 도동서원(道東書院)


귀갓길에 달성군 구지면에 있는 도동서원을 답사했습니다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제향 한 서원이지요

S자로 휘어진 낙동강변에 위치합니다


도동이란

성리학의 도(道)가 동(東) 쪽으로 와서 머문 곳이라죠


내친김에 서원에 대하여 좀 알아볼까 합니다


2019년 [한국의 서원] 9개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었죠


이 도동서원은 그 9개 중의 하나입니다

안동의 병산서원과 함께 서원 건축과 풍광의 백미로 알려져 있습니다


병산서원은 배롱나무에 꽃이 피는 여름이 제격이고

이곳 도동서원은 은행나무가 물드는 만추가 압권이죠


참고로

유네스코에 등재된 한국의 서원 9개는 다음과 같습니다


소수서원 ; 1543, 영주-안향

남계서원 ; 1552, 함양-정여창

옥산서원 ; 1573, 경주-이언적

도산서원 ; 1574, 안동-이황

필암서원 ; 1590, 장성-김인후

도동서원 ; 1605, 달성-김굉필

병산서원 ; 1613, 안동-류성룡

무성서원 ; 1615, 정읍-최치원

돈암서원 ; 1634, 논산-김장생



우선 서원이 뭐 하는 곳이길래 세계문화유산에 올랐을까요?


서원은 조선시대의

중 고 대학을 아우르는

사립 교육기관입니다


지금도 서원에 제향 된 멘토의 제사를 지내고

유교를 강학하는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으므로 유네스코에서는 충분히 보존할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이라 판단했을 겁니다



우리나라에 성리학이 도입되어 이를 신봉하고 공부한 학자 또는 벼슬아치를 신진사대부 라고 했는데요


이들은 고려말 불교가 문란해지자 급부상하여 개혁의 주체 세력이 되었죠


급진 개혁주의자는 고려를 엎어 버리고 조선을 세웠습니다만

점진 개혁파는 정몽주 선생이 살해되면서 야인으로 은둔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에 참여했던 유학자는 유학의 전파와 인재 등용의 창구로 공교육 기관인 성균관과 향교를 열었습니다


성균관은 중앙의 대학이고

향교는 지방의 중 고교쯤 됩니다만 향교가 점차 부실해졌죠


왜냐하면 지방에 까지 유교 본래의 도학을 가르치는 좋은 선생님을 배치할 수가 없었고 요즘의 학원처럼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교육기관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조선의 조정에 참여하지 않고 은둔을 해 버린 유학자들은 뭘 했을까요?


명색이 한때는 양반이었는데

농사를 주업으로 할 수도 없고

장사는 더군다나 어려웠겠죠

결국 글공부를 계속했을 겁니다


하다 보

성현이나 스승의 가르침이 그리워서 위패를 모셔놓고 제사를 모시기도 하고 틈틈이 후학을 가르치는 거죠


1543년 풍기군수로 있던 주세붕이 성리학을 처음으로 도입한 안향을 배향하고 유생을 가르치기 위하여 백운동 서원을 창건한 것이 시초인데요


향교가 부실해지면서

뜻있는 선비들이 극기복례를 기치로 진정한 유학을 가르쳐 보자는 자성론이 많았을 겁니다


하여

학교 설립정신의 중심인물인 멘토를

관학인 향교는 공자로 삼았지만

서원은 우리나라의 학문이 깊은 유학자를 멘토로 삼았습니다


이를테면

한훤당 김굉필

퇴계 이황

서애 류성룡 등이죠




본격적으로 도동서원을 스케치해 볼 텐데요


서원의 주목적은

배향과 강학과 유식입니다


사당을 지어서 멘토가 되는 분의 위패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제향공간이 있고

강당과 숙소를 구비하여 학생을 가르치는 강학공간

그리고

유생들이 시를 짓고 토론도 하며 휴식을 취하는 유식공간으로 나누어 놓았죠


도동서원도 마찬가지인데요

건물의 배치가 전형적인 서원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서원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반겨주는 게 거대한 은행나무입니다


임금으로부터 도동서원이라는 사액을 받고 중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김굉필 선생의 외증손 정구 선생이 1607년에 심었다고 하니 수령이 415년이네요


이 나무는 보통 위로 자라는 특성과는 달리 옆으로도 자란 가지가 여럿인데요

일설에 의하면 김굉필 선생의 인품과 학덕에 미물인 나무조차도 선생을 향하여 예를 갖추느라 읍을 하고 있는 형상이라고 합니다


수령에 걸맞게 포스가 장난이 아닌데요

나뭇잎이 노랗게 물들면 그의 진가가 더욱 발해지겠죠


그래서 도동서원은 가을에 탐방해야 한다는 이유입니다


첫 번째 관문은 수월루라는 누각입니다

병산서원의 만세루에 해당하는 것이죠

도동서원이 완성된 이후 철종시절에 추가로 지은 건물이라 하는데요

선비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토론도하고 휴식도 취하는 장소입니다


이 건물은 강당인 중정당에서 낙동강을 바라볼 때 강물이 찰랑찰랑 굽이치는 모습을 막아버려서 오히려 필요 없는 사족의 건물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답니다


이어서

[환주문]이라는 교문이 나옵니다


문이 아주 작습니다

높이가 169센티이고

바닥에는 문턱 대신에 정지석을 세웠습니다


갓을 썼던 선비들은 정지석에 멈춰서 옷매무새를 살핀 후 머리를 숙이고 이 문을 들어가라는 뜻이겠고

드나들 때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갓이 벗겨지겠죠


마음을 겸손하게 하고

스승에 대한 예를 표하라는 의미입니다


고불 맹사성 선생께서 젊었을 때 노 스님과의 대화에서 면박을 당하고 도망가다시피 문을 나설 때 문지방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치자 스님 왈

"머리를 숙이면 부딪치는 법이 없지요" 하는 말과 상통합니다


괴산의 화양구곡에 가면 [만동묘]라고 하는 사당이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중국명나라의 의종과 신종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세운 것이죠


만동묘는

화양서원의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해 있으며 계단을 수십 개 올라가야 되고 계단폭이 워낙 좁아서 정면으로는 걸을 수가 없습니다

명나라 황제를 정면으로 보지 말고 조아리며 옆으로 걸어라는 배려(?)인데요


환주문도 같은 맥락입니다

물리적으로 머리를 숙이게 만들고 항상 겸손을 몸에 배도록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교문을 지났으니

교실과 교무실과 교장실이 있어야 되겠죠

물론 학생이 숙식하는 기숙사도 구비해 놓았습니다


교실이 있는 건물을 중정당(中正堂)이라 하고 이곳이 성리학을 가르치는 곳이죠


[도동서원]의 현판이 2개가 걸려있는데요

하나는 선조가 내린 사액현판으로

임진왜란 때 화왕산성을 수비했던 경상도 도사 배대유의 필체이고

하나는 퇴계 이황의 글씨를 집자해서 만든 현판이라 합니다


중정당 앞쪽을 받치고 있는 여섯 개의 기둥 윗부분에 한지로 띠를 둘렀는데요

이를 [상지]라 한답니다


귀하고 위대한 분을 모신 서원이라는 것을 먼 곳에서도 알아보고 예를 갖추도록 나타낸 것으로 동방 5현인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중에 김굉필 선생이 가장 웃어른임을 알리기 위한 것이며 도동서원에만 흰띠가 둘러져있다고 하네요


이곳에는 말에서 내려야 하는 하마비가 없다는데요

상지가 하마비를 대신하며

낙동강을 지나는 배들도 이 상지를 보면 예를 표했다고 합니다


이 중정당은

정확하게(正) 가운데(中)라는 의미이므로 좌 또는 우로 치우치지 않고 곧 중용의 도를 실천한다는 의미를 지녔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를 통치하고 있는 위정자 들은 현충원의 참배뿐만 아니라 이곳에도 와서 중용이 무엇인지를 깨우친 연후에 나라를 다스려 주면 좋겠습니다



중정당 좌우로 기숙사가 배치되어 있고

동재인 거인재과

서재의 거의재입니다


원래 서원의 건물을 배치할 때

동재는 왼쪽에 위치하며 상급생이 사용하는 숙소이고

서재는 오른쪽이고 하급생의 숙소입니다


그런데

이곳은 북향이기 때문에 실제의 방위와는 반대입니다

동재는 서쪽

서재는 동쪽에 위치한 셈이죠


중정당의 뒤에 제향 공간인 사당이 있는데요

이곳에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더군요


하여간

사당에는 김굉필 선생을 주향했고

그 오른쪽에 정구 선생을 배향했답니다


도동서원의 건물 배치는

올곧은 김굉필 선생의 인품을 고려하여

정구 선생이 주도했으며

환주문부터 사당까지 일직선으로 좌우가 모자라거나 치우침이 없이 대칭으로 배치했다고 합니다


선비 정신의 최고봉이죠


♤♤♤♤♤♤♤♤♤♤♤♤♤♤♤



위 링크에서 언급했지만 도동서원은 좌와 우의 치우침이 없는 중용을 가르침의 근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심지어 주요 건물의 높낮이 구분과 정확하게 좌우 대칭으로 설계되어 있는 것이죠


스승인 김종직 선생께서 성리학의 대통을 이었고

적어도 김굉필 선생의 가르침에서는 동과 서,

좌와 우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성리학의 근본과 실천에 그 뜻이 있었죠


제자인 조광조 선생에게 바통을 넘긴 이후

성리학이 더욱 계승 발전하여

주리론(主理論)의 퇴계 이황과

주기론(主氣論)의 율곡 이이로 나뉘어서 정착되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조선 성리학의 양대산맥이 되었는데요


주리론을 앞세운 퇴계는 영남학파인 동인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주기론을 모토로 하는 율곡은 기호학파인 서인의 맹주로 추대되었습니다


이 두 학파는

조선의 붕당정치로 이어지고 대원군에 의하여 소멸될 때까지 무려 280년간 조선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았죠


붕당이 만들어진 이후

동인은 곧바로

유성룡의 남인과

이산해의 북인으로 분파되었고


남인의 맹주는 퇴계 선생

북인의 지주는 남명 조식 선생이었습니다


광해군 재위 기간에는 실천적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남명의 제자들인 북인이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만


북인 천하는 15년 후 서인과 인조의 쿠데타에 의하여 완전히 소멸하였습니다


서인에 의하여 택군(신하가 임금을 선택)이 된 인조는 병자호란과 삼배구고두의 수모를 겪으며 청나라에 항복하여 사실상 조선이 망한 거였죠


임금이 남의 나라에 항복까지 했는데도 집권세력 서인은 정권을 내놓지 않고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 뭐였을까요?


야당의 지리멸렬과 중전자리를 서인이 독차지했기 때문이었겠죠!


북인은 이미 명줄이 끊어졌고

남인은 대찬 인물이 없었다고 봐야 할 겁니다


천신만고, 치열한 예송논쟁 끝에 겨우 남인이 서인을 몰아내고 득세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정권을 잡았으면 잘해야 될 것 아닙니까?


부어라

마셔라

띵가띵가

날이면 날마다 늴리리야

기고만장

직무유기

배임에다

눈에 뵈는 게 없었죠


보다 못한 숙종은 경신년에 남인을 완전히 몰아내고 그 자리에 다시 서인을 박아 넣었습니다


이른바 [경신대출척]이고요

남인은 51년 만에 정권을 잡고 6년간 누리다가 송두리째 서인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장희빈을 등에 업고 기사년에 남인이 잠시 기사회생을 했지만 5년간 집권 후 갑술년에 또다시 서인에게 정권을 빼앗겼고

이후 남인은 정권창출을 못하는 불임 정당이 되고 말았습니다


훈구파가 사라지자 사림파끼리 싸우면서 동인, 서인으로 갈라섰듯이

남인이 비실비실하니 이번에는 정권을 잡은 서인끼리 쪼개지는데 역사에서는 노론, 소론이라 합니다


소론이 망한 후

노론은 또다시 시파와 벽파로 갈라지고 결국은 시파인 안동김씨가 60년의 세도정치 끝에 대원군에 의하여 거덜 났으니


조선의 280년 붕당정치에서

처음 쪼개진 동인, 서인 중 동인이 집권한 건

북인의 15년

남인의 11년 외

250년 이상을 서인이 조선을 좌지우지한 겁니다


학파로 보면

영남학파의 동인보다

기호학파의 서인이 정권을 주도했다 이 말입니다


혹시 아십니까?


천원짜리 지폐는 동인의 퇴계

오천원 지폐는 서인의 율곡


학문으로 보면 퇴계가 우위여서 천원짜리 발간 시 퇴계를 먼저 인용하였고


정권의 권세를 보면 서인의 율곡이 천원짜리 보다 값어치가 더 나가는 오천원권에 등장한 게 아닐까


ㅎㅎ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니까 오해는 마십시오


지역적으로 보면

경기 호남의 기호학파가 조선을 통치하였으니 보수라 하면 이곳을 지칭해야 할 것 같은데 아이러니하게도 겨우 26년을 집권한 영남학파의 경상도 지역이 보수의 본향인 것처럼 돼 버렸습니다


부르주아 집단은

많이 가졌고 지킬 것이 많아서 기득권을 내려놓거나 바뀌는 걸 굉장히 싫어하며 혁명적 사고를 거의 안 하죠


그래서 보수적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조선 대대로의 기득권은 서인의 기호학파이며 부르주아는 평야가 많은 경기 충청 호남이죠


해서

이들 지역이 보수 우파가 되어야 하고 영남지역이 진보 좌파가 되는 게 맞아 보이는데 우리가 체감하는 것은 왜 반대로 되었을까요?


이 상황을 잘 분석하여 명쾌한 해답을 내놓으면 박사 학위의 논문감이 되겠죠?!


저는 유추해 볼 수 있는 몇 가지 정황은 알고 있으나 논리적 근거나 팩트 여부를 증명할 수가 없으니 물음표로 남겨 놓겠습니다


암튼

도동서원의 김굉필 선생대에서는 동인과 서인의 구분이 없었는데 서인이 워낙 장기 집권을 했으니 김굉필 선생 또한 서인의 계보로 간주되는 것 같습니다


서인들의 계보를 올라가 보면 김굉필 선생에 닿거든요


제가 작년에 도동서원을 방문했을 때 어느 분으로부터 몇 가지 설명을 들으면서 동인 계보의 유명한 인물에 대해서 여쭤 봤더니 단호하게 모른다고 하더이다


모를 리가 없죠

모른다면 해설할 자격이 없는 것이며

김굉필 선생은 동도 서도 아닌데 이미 이분은 서쪽분으로 간주하여 서인들의 계보만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선생이 그렇게 중하게 여겼던 중정(中正)을 도외시한 것이겠죠!


중정은 도동서원의 강당 이름(中正堂)입니다



♥♥


귀갓길이 너무 이를 것이라 예상하여 유채꽃으로 유명한 남지의 수변공원 끝, [개비리길]을 찾았습니다


진주의 남강물이 북동진하면서 의령군과 함안군으로 갈라놓고 창녕군 남지읍으로 뚫고 나와서 낙동강과 합쳐집니다


합수되는 딱 그 지점이 개비리길의 출발점인데요


이름이 좀 특이하지요?


개비리길의 유래를 읽어 봤더니 진한 여운으로 남았습니다


개와 비리길의 합성어인데요

비리길은 벼랑에 나 있는 아주 좁은 길을 의미합니다


주로 짐승들이 다니는 길이지요


토끼가 다니면 토끼비리길

개가 다니면 개비리길


문경에 가면 고모산성이 있는데요


산성에서 내려다보면

물태극

산태극

길태극이 보입니다

휘감아 돌아가는 물길의 벼랑에 좁은 길이 나 있는데

이 길을 토끼비리길이라 하지요


비슷한 길이 창녕군 남지읍에도 있다는 것 아닙니까!


개가 다녔으니 개비리길인데 무슨 사연이 있는지 안내 표지판을 편집해 보겠습니다


옛날에

영아지마을에 사는 황씨 집에 누렁이 개가 새끼를 11마리나 낳았는데


그중의 한 마리가 유독 작게 태어 나서 조리쟁이(못나고 작아서 볼품없다는 뜻이라네요)가 되었고


어미의 젖꼭지가 10개여서

다른 형제들에게 항상 먹이 경쟁에서도 밀리고 치여서 왕따가 되기 마련이었겠죠


새끼들이 웬만큼 자라자 황씨는 10마리를 남지장에 내다 팔았지만 조리쟁이는 더 키우기로 맘먹었습니다


때마침 친정에 왔던 황씨의 딸이 조리쟁이를 보고는 자기가 키우겠다고 시댁으로 데려가 버렸습니다


며칠 후 딸은 깜짝 놀랐는데 친정에 있어야 할 누렁이가 시댁까지 찾아와서 조리쟁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다는 것이죠


이후에도 누렁이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에 한 번씩 꼭 찾아와서는 젖을 먹이고 간다는 걸 알았습니다


기특하게 여겼던 마을 사람들이 누렁이가 어느 길로 왔는지 궁금하여 몰래 따라가 보았는데

그 길이 오늘날의 개비리길이라는 것이죠


하찮다고 여기는 동물이지만 누렁이의 모성애에 진한 감동과 연민의 정이 느껴집니다


사람을 개에 빗대서 평가하는 경향이 많은데요


개처럼 싸워서 이기면

개보다 더한 놈

개와 같은 행동을 하면

개 같은 놈

개보다 못한 짓을 하면

개만도 못한 놈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최근에 키우던 개를 버렸던 사람이 있는데요

더한 놈

같은 놈

못한 놈

중 어느 놈에 해당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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