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까지도 봄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는데 완연한 봄이다. 투박한 옷을 집어넣고 밝고 가벼운 옷을 걸어놓으며 봄이 온 것을 실감한다. 나무들이 파란 옷을 입고 불어오는 바람과 춤을 춘다. 겨우내 벗었던 몸을 이파리로 가리고 새롭고 예쁜 모습으로 인사를 한다. 사람은 겨울이 오면 옷을 더 껴입는데 나무들은 겨울이 되면 나목이 된다. 나뭇잎 하나 도 남기지 않고 다 털어 버리고 서있는 나무들은 엄청 추울 것 같은데 얼어 죽지 않고 새파란 이파리를 달고 봄을 맞는 것이 신기하다. 추운 겨울에 깊은 땅속에 있는 뿌리는 봄을 준비하고 때가 되면 피어 난다.
죽은 듯이 서 있는 나무들도 가만히 보면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매사에 생사가 정해져 있다는데 참을성 없는 인간은 마음대로 안된다고 짜증을 내고 불평하며 산다. 남들의 삶은 편안해 보이고 매사가 잘 풀리는 것 같은데 알고 보면 고단하지 않은 삶은 없다. 누구나 삶의 방식이 다르고 가는 길은 다르기에 결과도 다르다. 누렇게 누워 있는 잡초의 생은 작년 가을에 끝을 맺은 것 같은데 또 다른 풀들이 그 자리에서 자라나 들판을 푸르게 만든다. 한 철 살다가 가는 잡풀들이 봄을 먼저 알리고 인간들에게 희망을 준다. 추운 겨울이 다가올 때는 괜히 걱정이 앞서는데 봄을 기다리며 봄을 맞으면 모든 걱정이 사라진다.
하나 둘 땅을 헤집고 나와 땅을 덮고 꽃을 피우는 작은 생명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저 좋다. 개미는 개미의 일을 하고 벌 나비는 그들의 일을 하며 열심히 산다. 살다가 보이지 않는 흔적을 남기고 생을 마감한다. 다시 태어나지 못해도 그들은 그것으로 만족한다. 어느새 세월 따라 나의 생각도 조금씩 달라져가고 있음을 느낀다. 죽음이라는 단어조차도 싫어하고 거부했는데 지금은 서서히 받아들이며 산다. 한 치 앞을 모르기에 장담할 수는 없는 게 인생이지만 준비를 하고 살면 좋을 것 같다. 사람마다 명이 다르기에 순서가 없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즐겁게 살다 가면 된다는 말을 한다. 듣기 좋은 말이고 하기 쉬운 말인데 그렇게 살기가 어렵다.
내일이 보장된다는 확신이 없는데 계획을 세우며 살 수 없어도 매일매일 우리에게 오는 시간은 준비하라는 시간들이다. 내일이 올 것이라 믿고 오늘을 허투루 보낸다면 갑자기 찾아오는 손님을 어찌 맞을까? 하다못해 식사를 초대하고 손님들이 오기 전에 준비를 해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갖는다. 내게 할당된 시간은 얼마나 남았는지 아무도 모른다. 백세시대라고 하지만 나이가 어느 정도 들면 정신도 희미해지고 몸도 마음대로 할 수 없어 백 살 까지 살아도 삶의 질은 떨어질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살아있다고 할 수 없다.
겨울이 끝나면 두꺼운 옷은 장롱 깊숙한 곳에 보관하고 잊힌다. 계절 따라 세월 따라 해야 할 일이 있고 접어야 할 일이 있다. 봄이 와서 텃밭에 씨를 뿌리고 모종을 사다가 심는다. 작은 씨앗들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무거운 땅을 들고 세상에 나온다. 어제 남편도 텃밭에 씨앗을 뿌리고 흙으로 살짝 덮어주었다. 그제 어제 비가 와서 다행이었지만 부족한 것 같다며 열심히 물을 준다. 며칠 전 가까이 사는 친구가 고추 모종을 키워다 주었는데 이 정도 날씨면 밖에 내어 놓아도 얼어 죽지는 않을 것 같다며 큰 화분에 옮겨 심었다. 가느다란 뿌리와 잎이 잘못하면 꺾어져 부러질 것 같아 아기 다루듯 하며 간신히 심었다.
겨울에 호박을 사다 쪄먹고 말려놓은 호박씨는 무더기로 사과나무 옆에 심어놓았는데 잘 자라면 이웃들에게 모종을 나눠 주려고 한다. 상추씨는 내일 심으려고 물에 담가놓았고 오늘 사온 토마토 모종은 내일 상추 심을 때 같이 심으려 한다. 작은 텃밭이지만 어느새 부추와 파는 한 뼘 넘게 자라서 끼니때마다 식탁에 도움을 주고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파 값이 너무 비싸서 사다 먹기가 부담스러운데 소담스럽게 잘 자라는 파를 보니 마음까지 풍요로워진다. 열심히 물을 주다 보면 밥상에 올라 올 날은 머지않다.
갑자기 봄이 왔나 했더니 봄은 이미 오래전에 온 것이다. 땅이 따뜻해지기를 바라며 땅을 들고 나오는 새싹들이 어느새 땅을 덮었다. 햇살이 눈부시고 따뜻한 바람이 불어온다. 사람 살기 가장 좋은 시기다.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아 걷는 발돌음이 너무나 가볍다. 새들이 목청 높여 노래한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내일이 안 올 것처럼 삭막하다. 한쪽에서는 축구를 하고 k-pop 공연을 한다. 천문학적인 사람들이 모여 삶을 즐기는데 한쪽에서는 세계가 불경기에 식량부족 현상이 생기고 물자 공급이 안되어 물가가 상승한다고 걱정을 한다. 과연 어느 쪽에 장단을 맞추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세상은 끊임없이 잘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