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잘 살아갈 일만 남았다

by Chong Sook Lee



습관이 무섭다. 바쁘게 살다 보니 잠자는 시간이 짧아져 늦잠을 자려해도 안된다. 시계처럼 아침 6시에 깬다. 몸이 안 좋을 때 조금 더 쉬면 좋을 텐데 일단 침대에서 나온다. 옷을 입고 피곤하면 소파에 누워 있을지라도 밖으로 나온다. 오늘은 한동안 못 본체 한 그림을 그려보고 싶어 진다. 하얀 캔버스가 곁눈질로 나를 쳐다보는 것을 안다. 마음은 행동하게 하고 행동은 무언가 흔적을 남긴다. 심란할 때 그림을 그리면 마음이 안정된다. 어떤 그림을 그릴까? 한동안 숲을 찾지 못했다. 숲과 계곡이 그립다. 나무들이 서있고 계곡이 흘러가는 모습을 생각하며 그리기 시작한다.


상상의 날개를 편다. 어떤 색이 좋을까? 큰 나무를 그릴까? 작은 나무를 그릴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하늘부터 그린다. 하늘색이 좋을까? 아니면 석양을 그릴까? 빨강 노랑 색을 섞어서 석양을 그려본다. 그럴싸한 하늘이 완성됐다. 다음은 나무를 그릴 차례다. 물가에서 자라는 나무들은 키가 그리 크지 않다. 바람을 많이 받아서인지 키가 크지 않고 가늘지만 단단하다. 사람과 같다. 힘겨운 삶을 견디고 살면 강해지듯 강한 바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강해진다.


키가 작고 가는 나무들을 캔버스에 그린다. 숲이 꽉 차서 뒤편의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깊은 숲이 되었다. 빨강 노랑 초록 파랑 검은색 페인트를 번갈아 칠해 본다. 가을이 오는 숲 같이 보인다. 아마 내 마음이 벌써 가을을 기다리나 보다. 그러다 보니 석양의 붉은빛과 가을 나무 색이 비슷해서 하늘과 나무가 명암이 맞지 않는다. 하늘이 좀 더 밝아야 할 것 같다. 하늘색과 하얀색을 섞어 칠하니까 나무가 더 선명하여 눈에 잘 띈다.


맑은 가을 하늘에 나무들이 단풍지기 시작하는 아름다운 가을 모습이 되어간다. 하얗던 캔버스가 숲의 모습을 하기 시작한다. 어떤 그림을 그릴지 눈으로 보고 그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 재미있다. 어떤 내일이 될지 몰라 살게 되는 인생 같다. 알면 좋겠지만 모르기에 희망하고 실망하고 또 살아간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마음이 바뀐다. 처음 생각하고 그리던 그림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그림으로 완성되기도 한다.


숲을 그리려다 꽃을 그리기도 하고, 강을 그리려다 산을 그리기도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처럼 여러 가지를 해보며 좋아하고 적성에 맞는 일을 하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어릴 때부터 글쓰기를 좋아해서 틈틈이 글을 쓰며 살아왔는데 정년퇴직 후에 우연한 기회로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 취미가 되었다. 글이 안 써지면 그림을 그리고, 그림이 안 그려지면 글을 쓰며 시간을 보낸다.


지난 한 달 동안 이런저런 일로 몸과 마음이 힘들어서 마음을 잡지 못하고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사람 사는 게 순탄하지 않아 좋고 나쁜 일이 순식간에 생긴다. 좋은 일만 있으면 좋겠지만 세상일이 원하는 대로 내뜻대로 안된다. 며칠 전 남편이 약을 사러 나갔는데 필요한 약이 없어서 집에 오는 길에 다른 약국에 가면 약을 살 수 있을까 해서 가다가 교통사고가 났다.


앞부분이 만신창이가 된 차를 보며 큰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남편은 다치지 않았다. 앞차와 정상적인 간격으로 가고 있는데 갑자기 그 차가 급정지하는 바람에 미처 브레이크를 꽉 잡지 못한 채 박았단다. 앞차는 조금 찌그러졌고 양쪽 다 사람은 다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생각지도 못한 차사고였다. 남편은 사고로 에어백이 터져서 정신이 없어 가만히 앉아 있는데 앞차를 운전하던 사람이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간신히 차 밖으로 나갔단다.


평생을 무사고로 살아온 남편인데 생전 처음 난 차 사고로 얼마나 놀랐을까? 남편이 약을 사러 나가 돌아올 시간이 지나서 기다리고 있는데 전화가 와서 나도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차야 고치면 되고 안되면 폐차시키고 새로 사면 되지만 사람이 다치지 않았으니 천만다행이다. 에어백이 터지는 반동으로 팔 안쪽이 스크래치가 조금 나고 새끼손가락 부근이 멍이 든 것 외에는 말짱했다.


차가 찌그러지고 사람까지 다쳤다면 한심 했을 텐데 남편이 다치지 않았다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차사고가 안 났으면 더욱 좋겠지만 이미 사고는 났고 다행히 다친 사람이 없으니 하늘이 도왔다. 10년 동안 사고 없이 우리를 잘 데리고 다니던 차와의 인연이 끝이 났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시작이 있고 끝이 있듯이 차도 언젠가는 우리와 헤어지는데 지금이 그 시간이다 생각이 든다.


10년 동안 고장 없이 잘 타고 다니던 차인데 이제 새 차를 사야 하나 보다. 어차피 몇 년 지나면 차를 바꿔야 하는데 조금 일찍 바꾸게 되었다 생각하면 마음 편하다. 주위 사람들 말로는 요즘 차를 사고 싶어도 코로나 여파로 차가 부족해서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고 하는데 모르겠다. 걱정할 필요 없다. 다 잘될 거라 생각하면 모든 일이 잘된다.


알레르기로 고생하다가 차사고가 나서 정신이 번쩍 났다. 차는 새로 사면 되고 몸도 조금씩 나아진다. 아침에 습관처럼 그리던 그림을 다시 그리며 다시금 마음의 평화를 갖는다. 세상만사 마음이 내키지 않을 때는 억지로 할 수 없다. 이제 몸도 조금씩 나아지고 마음도 자리를 잡았는지 캔버스가 눈으로 들어온다. 아무것도 없는 하얀 캔버스에 하늘을 그리고, 나무를 그리고, 계곡을 그리며 마음을 쏟아본다. 어제는 지나갔고 앞으로 건강하게 잘 살아갈 일만 남았다. 단풍 진 나뭇가지 하나가 길 위에 누워있다. 벌써 가을이 오나보다.

(그림, 사진: 이정숙)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