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못다 내린 비가 오늘도 아침부터 계속 온다. 어제 하루 종일 물을 마신 자연은 눈 부시도록 푸르고 아름답다. 가물어서 누렇게 타들어 갔던 잔디는 푸른색을 되찾고 비바람에 쓰러졌던 들꽃들은 다시 일어나서 자리를 지킨다. 참으로 대견하다. 쓰러지고 넘어지고 밟혀도 굽히지 않고 살아나서 제 할 일을 다하고 가는 모습에 경의를 표한다.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바람이 불어도 살아야 한다는 집념으로 견디는 들꽃들은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틀 동안 비가 내려서 온도가 많이 내려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덥다고 짧은 옷을 입었는데 춥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어느 해 인가 8월 말에 눈이 왔다. 여름이 채 가기 전에 겨울이 와서 한동안 가려고 들지 않아 사람들은 거의 체념을 했는데 눈이 녹고 나서 오랫동안 날씨가 좋아졌다. 특히 이곳은 인디언 서머가 있어 겨울이 오기 전에 아름다운 가을을 가져온다. 자연의 섭리는 참으로 오묘해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지쳐가는 사람들의 영혼을 달래준다. 겨울이 오기 전에 못다 한 여름을 대신하여 가을을 주고 봄을 기다리는 희망 속에 추운 겨울을 견디게 한다. 아무리 힘든 시간도 지나고 보면 추억의 아름다운 옷을 입고 그리워진다. 경제적으로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은 잊히지 않고 생각난다.
배가 고픈데 돈은 없고 식당에 들어가서 제일 싼 음식을 먹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때는 그것이 당연한 줄 알고 받아들였다. 아는 이 하나 없는 이국땅에 와서 살기는 녹록지 않았는데 버티고 견딘 것을 생각하면 기적이다. 그때는 모두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먹고 싶은 것을 찾아다니는 호사로움 보다 하루를 살기 위해 버티었던 시절이었다. 세월 따라 그런 시간들이 지나고 이제는 노년의 삶을 산다. 오늘을 살기 위한 걱정보다 오늘을 즐기며 살고 안갯속을 걷는 것 같은 막연한 현실이 아닌 하루하루 행복을 느끼며 산다. 겨울이 없으면 봄이 없듯이 삶은 이처럼 인간을 데리고 다니며 소중한 것을 알려준다.
빨리 크기를 바라던 아이들은 각자의 바쁜 삶 속에 잘 살아가는 것을 보면 세월이 약 이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나이 든 사람들을 보면서 사람이 늙으면 저렇게 되는구나 했는데 어느새 나의 모습이 그들과 닮아간다. 젊을 때 나는 부모님을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늙어가면서 내 얼굴에 그분들의 모습이 보인다. 작은 나무들이 하늘로 치솟다가 어느 날 기운이 떨어지고 등 굽은 나무가 된다. 세월의 연륜은 숨길 수 없기에 어제의 나는 사라지고 모르는 내가 되어 산다. 바쁘게 서두르며 사는 것이 인생인 줄 알았는데 천천히 살아도 되는 것을 배운다.
꼴찌가 되고 일등이 되고 한 발 두 발 걸어서 마지막까지 가는 것이 중요함을 안다. 앞장서서 걷던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고 이제는 우리 차례가 되어 걷는다. 언제 종착역에 도착할지 모르지만 끊임없이 앞을 향해 간다. 어제는 가고, 내일은 오지 않고, 오늘은 나와 함께 있다. 예전에 친하던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사는지 모른다. 영원할 줄 알았는데 세월 따라 친구도 변하고, 인심도 변한다. 유행이 물건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친구도 한때 좋았다가 시들해진다. 아이들 어릴 때 만나서 웃고 놀던 친구들은 아이들이 성장하며 집을 떠나듯 그 친구들도 내 마음을 떠난다.
모든 것이 자연의 섭리다.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며 새로운 삶이 이어지고 최선 속에 최고를 만들며 산다. 사업에 실패한 사람도, 실연한 사람도 희망과 기대 속에 다시 시작한다. 비바람 폭풍우 속에서도 꽃이 피고, 전쟁 속에서도 사랑은 지속된다. 새날이 바로 희망이고 기쁨이다. 어제의 아픔은 추억이 되고 오늘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살다 보면 내일은 다시 행복한 오늘이 되어 나를 만나러 온다. 행복은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기에 가장 가까이에 있다. 각자의 가슴속에 행복의 꽃이 피려면 마음속에 자리를 비워놓아야 한다.
마음이 너무 복잡하고 욕심과 시기와 질투로 꽉 차 있으면 행복이 들어오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간다. 친구가 많고 주위에 사람이 많아도 사람들은 외롭다고 한다. 가진 것 많고 부족한 것이 없어도 우울증에 걸려서 괴로워한다. 가진 것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기는 쉽지 않다. 이루기 위해 노력한 시간들이 아깝기도 하고 거두기 위 한 기대를 하기 때문에 어렵다. 뿌릴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다고 한다. 올 때가 있으면 갈 때가 있음을 알고 살아야 하듯이 얻은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 힘겨웠던 날들이 가져다주는 추억을 먹으며 사는 게 인생이다. 비가 그친 하늘은 여전히 구름이 많지만 태양은 하늘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안다. 지금은 흐리지만 맑게 개인 날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