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은 황금빛으로 가득하다. 하늘을 본다. 하늘은 파랗고 이미 가을은 문턱을 넘어왔다. 나무들은 하루가 다르게 물이 들고 기운이 다된 이파리들은 삶을 끝내고 땅으로 떨어져 여기저기 뒹군다. 나뭇잎이 하나둘 떨어지며 생을 마감하듯 내 마음속에 있는 욕심도 하나 씩 버리고 싶다. 예전에는 이렇게 가을이 시작될 때는 어딘가 멀리 여행을 가고 싶었는데 지금은 동네 한 바퀴 돌아도 기분이 좋아진다. 자연은 아름다운 색으로, 찬란한 모습으로 사람들의 눈을 현혹하고 우리는 우리대로 할 일을 다 마치고 한가한 시간 속에 지난날들을 생각하는 시간이다.
그토록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날들이 지나고 보니 그저 아름답기만 한 날들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연연하며 밤잠을 설치며 애태우던 날들은 꽃을 피우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뛰어다닌 날들은 열매를 맺기 위함이었다. 이제는 누렇게 익어가는 곡식을 보며 추수하는 기쁨을 누리면 된다. 떨어지기 위해 피어나고, 다시 태어나기 위해 땅에 떨어져 시들어 삶이 이어지고 끝이 되고 다시 시작되기를 반복한다. 동네 한 바퀴 걸으려고 길을 나선다. 아무도 살지 않는 것처럼 조용한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로 걸어본다. 가로수 사이로 맑은 하늘이 보인다. 차들은 급하게 어디론가 줄지어 간다.
아침 공기가 차서 얇은 재킷을 입고 나왔다. 봄이 온 지 엊그제 같은데 가을이라니 조금은 서글퍼진다. 세월이 참 빠르다. 젊음은 봄처럼 슬그머니 왔다가 여름처럼 살며시 갔으니 나도 내 인생의 가을을 맞아야 한다. 엊그제 그야말로 몇 년 만에 친구 딸 결혼식에 다녀왔다. 코로나로 만남과 외출이 금지되어 지난 2년 동안은 큰 행사가 없었는데 이제는 코로나와 함께 사는 세상이 되었다. 결혼식에서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여러 가지 소식을 주고받으며 환담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실종된 사람은 아직 못 찾았고, 어떤 사람은 심장수술을 하고, 어떤 사람은 풍을 약하게 맞았다고 한다. 어느새 세월이 그렇게 흘렀는지 생전 늙을 것 같지 않던 사람들이 다들 노인이 되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 손주들 이야기를 하고, 허리도 굽고, 배도 나오고, 머리가 허옇다. 이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세월이다. 숨길 수도 없고, 감출 수도 없는 것이 늙음이라고 하는 말이 생각난다. 제 아무리 멋있고 예쁘던 사람들도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다. 하늘에 구름이 마치 바다에 파도처럼 출렁거린다. 하늘이 바다가 되었다. 하늘과 바다는 서로 닮았다. 바닷속에 여러 가지 물고기들이 살고 있듯이 하늘 안에도 우리가 모르는 그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 다. 해가 뜨고 해가 지고, 달과 별이 뜨고 지면서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듯 바다도 쉬지 않고 움직인다.
강과 바다에 사는 물고기들이 이유를 모르는 채 떼죽음을 당하고 있다. 물이 오염되고 자연이 부패되어 예전에 없던 병이 생기고 사람과 동물을 위협한다. 세계 경제는 하락하고 금리는 오르고 물가는 상승한다 는 희망이 없는 뉴스만 들린다. 그래도 이렇게 나와서 걸으며 자연과 대화하다 보면 세상은 아름다워 보인다. 인심이 험악해지고 살벌해져 가도 좋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선은 악을 이긴다는 말이 맞다.
걷다 보면 생각은 어느새 지난날들로 돌아간다. 지금 사는 곳에 오래 살다 보니 아이들의 추억이 많이 남아 있다. 어린 세 아이들을 데리고 바쁘게 살면서 틈틈이 아이들과 걸었던 이 길은 그대로인데 아이들은 이제 마흔을 넘어 중년이 되었다. 시간을 내서 캠핑을 다니며 캠프 파이어 앞에서 밤늦도록 이런저런 이야기 꽃을 피우며 사춘기를 보내고 갱년기를 보내며 지금의 우리가 되었다. 마냥 철없어 보이는 아이들이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어도 나보다 30살이 어린것을 생각하면 잘 살고 있는 것이다. 내 눈높이에 맞추고 내 생각과 같을 수는 없다.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면 그저 고맙다.
시대가 변하여 때로는 젊은이들의 삶을 전부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것이 그들의 살아가는 방식이다. 이민 1세인 남편과 나는 비빌 언덕도 없었고 가진 것도 없었기에 더 많은 인내가 필요했다. 다행히 우리의 희생과 헌신이 아이들에게 힘이 되어 그들은 그들의 뜻을 펼치며 살아가기에 더없이 행복하다. 한 푼이라도 더 벌고 더 모아 보려고 애를 쓰며 살았기에 오늘의 우리가 편하게 살 수 있고 아이들도 우리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 젊었던 그 시절에 하고 싶은 것 다하고 살았다면 오늘 우리는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때 당시 이민 생활은 그야말로 외줄 타기나 다름없어 죽기 아니면 살기로 살았다. 순간의 실수로 발을 헛디디면 곤두박질치는 삶이었다. 그때는 우리뿐이 아니라 모든 이민자들이 그렇게 살았다. 그렇게 살았던 모든 것들이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이민 초기에 알던 사람들을 어쩌다 만나면 그때 이야기를 하며 밤새는 줄 모르고 이야기 꽃을 피운다. 지금 힘들어도 지나가면 고통은 잊히고 아름다움만 남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집 앞까지 왔다. 나날이 빨갛게 익어가는 마가목 나무가 손짓하며 기다린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온다. 머지않아 아주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