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만치 오던 가을이 빠르게 달려온다. 울긋불긋 예쁜 옷을 입고 화려한 모습으로 온다. 성질 급한 나뭇잎이 벌써 떨어져 거리를 헤매는 낙엽도 많다. 바람이 불면 노란 낙엽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같이 가다가 어딘가로 혼자서 가버리기도 하고, 한데 모여 지난여름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계절은 참으로 냉정하여 한번 가면 뒤도 돌아다보지 않고 간다. 미련은 사람만이 갖는 유일한 감정이다. 미련 때문에 울고 후회하고 안타까워한다. 이미 가버린 세월을 잊지 못하고 사는 것이 인간이다. 하늘은 한없이 높아만 가고 여름의 뜨거운 정열은 식어버린 지 오래다. 며칠간의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늦잠을 늘어지게 자고 일어났다.
놀고먹고 왔는데도 피곤한지 침대에 누워서 일어나고 싶지 않지만 배가 고파 일어나 옷을 입는다. 춥지는 않아도 선선한 바람이 긴 옷을 찾아 입게 한다. 어느새 가을이 집안까지 들어와 앉아 있어 세월의 빠름을 느낀다. 더위와 모기 때문에 쩔쩔매던 시간이 지나고 따뜻한 햇볕이 좋다. 늦은 아침을 간단히 먹고 빨래를 하고 아침 운동을 하러 산책을 나선다. 며칠 사이에 잔디가 누런 옷을 입고 있다. 햇살이 곱게 내려앉은 학교 운동장을 지나 동네 한 바퀴를 걷는다. 추워서 재킷을 입고 나왔는데 걷다 보니 더워서 땀이 난다. 재킷을 벗어 허리에 두르고 걸어간다.
오래된 대학교 빌딩을 부수는 작업이 거의 마무리되어 간다. 멋진 최신식 빌딩을 신축하려나 보다. 오래된 빌딩은 이렇게 없어지고 새로운 빌딩이 생겨나면 옛것은 잊힌다. 학교가 성당 옆에 있어서 일요일 미사에 오는 신자들이 학교 주차장에 주차를 하는 편리함이 있어 좋았는데 이제 새로운 빌딩이 지어지면 그런 혜택도 없어진다. 세월 따라 모든 것들이 변한다. 빌딩을 허물어서 시야가 뻥 뚫려 너무 좋은데 고층 빌딩이 들어서면 답답하겠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지어지는 고층 빌딩으로 하늘이 가려지고 인간의 욕심은 더 많아진다. 한적한 동네에 새 빌딩이 들어서면 좋은 점도 있겠지만 단점도 있다. 교통량과 소음이 많아지고 범죄도 따라서 증가한다.
초등학교 옆을 지나가는데 점심시간이 끝나는 종소리를 듣고 아이들이 급하게 교실로 뛰어 들어간다. 운동장을 서서히 걸어본다. 30년 전, 세 아이들이 어릴 때 다니던 학교이고 손주들이 집에 오면 즐겨 찾는 학교 놀이터이다. 우리 집에서 길 한번 건너가면 놀이터도 있고 넓은 학교 운동장이 펼쳐져 있다. 추석날은 학교 운동장 언덕에 서서 보름달을 구경하고, 겨울에는 언덕에 하얀 눈이 쌓여 있으면 아이들은 미끄럼을 타며 논다. 여름철, 저녁을 먹고 손주들과 놀이터로 가서 실컷 놀기도 좋고, 간식을 싸 가지고 소풍을 가도 좋은 거리다. 멀리 가지 않고 도 여러 가지 놀이를 할 수 있어 너무 좋다.
33년이 넘도록 똑같은 집에 살면 싫증이 날만도 한데 살수록 정이 드는 이유 중 하나다. 아무도 없는 놀이터와 운동장에 놓여있는 피크닉 테이블에 잠깐 앉아 본다. 작년 여름에, 큰 아들과 며느리가 우리 집에서 재택근무를 할 때, 심심해하는 손자들을 데리고 학교 운동장으로 가면 너무 좋아했다. 여름 방학이 긴 이곳은 정부에서 무료로 운영하는 여름학교가 있다. 봉사자들이 동네 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을 위한 여러 가지 프로그램으로 놀이를 한다. 긴 여름날, 자칫하면 지루해하는 아이들이 점심 식사 후에 두세 시간 뛰어놀고 나면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잔다.
작은 것에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손주가 직접 만든 연을 가지고 며칠 동안 재미있게 놀던 생각이 난다. 종이 접시에 , 크고 작은 끈을 풀로 붙이고 연을 날리는 긴 끈을 하나 달아서 그 끈을 잡고 앞으로 달려가면 멋지게 날아간다. 무지개색 구슬을 이어 목걸이와 팔찌를 만들었는데 너무나 예쁘고 신기한지 목에 걸고 손목에 끼고 좋아하며 식구들에게 자랑하던 생각이 난다. 아직 어린 여동생을 위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목걸이를 만들고 엄마를 위해 팔자와 목걸이를 만들어 가져다주며 행복해하던 손주가 보고 싶다. 아무것도 아닌 시시한 것들이지만 아이들의 순수한 눈은 세상을 다 가진 듯 좋아한다. 욕심 없고 순수한 아이들의 마음을 닮고 싶다.
학교 운동장을 걸어 나와 동네로 걸어본다. 마가목 나무 열매가 새빨갛게 익어 간다. 색색으로 물들어 가는 나무들이 저 나름대로 최고의 모습을 보여준다. 노랗고 빨갛고 앞서가고 뒤따라가며 가을을 만난다. 오지 않는 봄을 애타게 기다린 것이 엊그제 같은데 다시 봄을 기다리는 계절이 온다. 인생은 어차피 기다림의 연속이다. 좋아도 보내야 하고 싫어도 맞아야 하는 것이 삶이다.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듯이 앞으로 남은 세월도 그렇게 왔다 갈 것이다. 한가한 아침나절에 조용한 동네 한 바퀴를 돌며 옛 생각에 잠겨있는다. 어찌 보면 시시한 나의 일상 같지만 평화로운 이대로가 좋다. 멀리 가는 여행도 좋고, 친구들과의 만남도 좋지만 집이 좋고 살고 있는 동네가 좋다. 삶은 이렇게 소소하게 나를 이끌어주고내 마음을 닮은 가을 국화는 노랗게 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