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여름이면 시원하다고 할 텐데 왠지 모르게 쓸쓸하다. 여름이 너무 더워 가을이 오면 좋겠다고 했는데 막상 가을비가 내리니 걱정이 앞선다.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다. 노랗고 빨간 옷을 입고 서 있는 나무들이 멋지다. 봄보다 여름보다 더 아름답다. 사계절 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다. 봄은 여름이 가까워져야 제대로의 봄을 볼 수 있다. 여름이 가지 않을 것 같아 푸대접을 하다 보면 어느새 가을이 치고 들어온다. 비 오는 뜰에는 이미 썰렁하고 쓸쓸한 가을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겨울을 벗고 손톱만 한 연두색 새싹이 돋아난 날을 생각한다. 봄이라고 하기엔 이른데 꽃샘바람으로 기를 펴지 못하고 파르르 떨며 새잎을 만드는 나무들이다. 추위를 견디고 땅을 헤집고 나오는 새싹들이 하나 둘 보이면 심술궂은 겨울은 가던 길을 되돌아와서 하얀 눈을 뿌린다. 지난 4월에, 봄이 올 생각도 하지 않는 이곳을 떠나 빅토리아에 사는 딸 네 집에 꽃구경을 간 적이 있다. 가기 전에 뜰을 보니 튤립이 손가락 만하게 자라고 있었다.
여행을 다녀오면 예쁘게 자라 있겠지 했는데 가는 날부터 오는 날까지 열이틀 동안 매일 눈이 왔다. 우리는 빅토리아에서 눈을 피할 수 있었지만 집에 와서 보니 오는 눈을 다 맞고 얼어 있었다. 해마다 꽃이 필 때는 가기 싫어하는 동장군 때문에 낭패를 본다. 그것뿐이 아니다. 앵두꽃이 피고 사과꽃이 필 때마다 겨울은 심술을 부린다. 날이 따뜻해야 꽃이 피고 벌 나비들이 오고 가야 사과와 앵두가 달리는데 앞을 가로막는 겨울 때문에 봄이 오지 못한다.
이 모든 것들은 자연의 조화이기에 어쩌지 못한다. 이제 가을이 왔으니 머지않아 겨울이 올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며 추운 것이 싫다. 추워서 발발 떨면서도 내복을 안 입던 시절 이 있었는데 지금은 조금만 추워도 옷을 겹겹이 껴 입는다. 아침부터 내리는 비를 보고 있으니 오늘은 따끈한 손 칼국수가 먹고 싶다. 간단히 반죽하여 쓱쓱 밀어서 멸치 국물에 조갯살을 넣고 한소끔 끓여서 호박 고명을 얹어서 시원하게 한 그릇 먹고 나면 좋겠다.
칼국수를 먹을 생각을 하니 벌써 입안에 침이 고인 다. 언제 먹어도 맛있는 칼국수는 추억과 그리움의 음식이다. 몸이 약하셨던 친정엄마를 위해 친정 아 버지가 손 칼국수를 담당하셨다. 엄마는 국물을 만드시고 아버지가 얇게 밀어놓은 반죽을 가늘게 채 썰어서 팔팔 끓는 국물에 넣는다. 썰어놓은 여러가지 고명을 넣고 끓여서 간을 해서 먹던 생각이 난다. 어린 우리들은 둥그런 상에 앉아 맛있는 칼국수 먹을 생각을 하며 기다리고 엄마는 스테인리스 그릇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손 칼국수를 담아 주신다. 왜 그리도 맛있는지 형제들 떠들던 소리가 잠잠해지고 먹는 소리만 난다. 반찬은 김치 하나면 충분하다.
한번 생각난 칼국수는 머리를 떠나지 않고 맴돈다.
-급하게 멸치 국물을 끓이고 반죽을 한다.
뜨거운 물로 익반죽을 해야 국수가 쫄깃쫄깃하다.
-밀가루 두 컵에 뜨거운 물과 기름을 넣고 섞는다.
-반죽을 비닐봉지에 넣어 냉장고에 10분 정도
숙성시킨다.
-반죽을 꺼내어 밀가루를 뿌리고 얇게 민다.
-얇게 민 반죽을 가늘게 썰어 반죽이 서로 붙지
않게 털어서 쟁반에 놓는다.
-국물이 끓는 동안 호박과 양파와 파를 썰어 넣고
마늘과 생강도 준비한다.
-국물이 팔팔 끓으면 멸치와 다시마를 건져내고
칼국수를 넣어 젓갈로 휘휘 젓는다.
-국수가 익으면 썰어놓은 호박과 양파와 조갯살을 넣고
마늘과 생강과 소금 간장을 넣어 간을 마친다.
-다 익은 칼국수를 그릇에 국물과 함께 담고
썰어놓은 파를 넣는다.
-다대기는 생강을 갈고 고춧가루와 참기름을 넣어 섞는다.
-기호에 맞추어 매운 고춧가루 다대기나 양념간장을 넣어 먹으면 된다.
온 집안에 맛있는 칼국수 냄새가 진동한다.
칼국수를 먹고 추억도 먹는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먹는 칼국수 덕분에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추억 속에 어린아이가 된다.
하늘은 먹구름을 잔뜩 머금고 있다. 비는 그쳤지만 언제라도 쏟아질 기세이다.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아랑곳하지 않는 나무들은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든다. 햇살과 비와 바람에 감사하는 자연에게 많은 것을 배운다. 불평도 불만도 없이 오는 대로 맞고 보낸다.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놓고 살짝 웃는 햇살이 따사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