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바뀌고 있다. 꾸물거리는 날씨가 계속되는 것이 자연도 힘이 드나 보다. 갑자기 떨어진 온도로 사람들의 옷이 두꺼워졌다. 화려한 색상의 여름옷이 들어가고 우중충한 재킷을 입고 있다. 나무들은 노랗게 물들어 가고 낙엽은 거리를 뒹굴어 다닌다. 동네가 떠내려 가도록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까마귀는 어디로 갔는지 동네가 조용하다. 올해는 유난히 까마귀들이 많았는데 여름 내내 짖어 대던 까마귀가 요즘엔 잘 보이지 않는다. 까마귀들이 많이 있을 때는 시끄럽고 보기 싫었는데 한여름 동안 정이 들었는지 궁금하다.
조금 전과는 달리 하늘이 높고 푸르다.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이다. 파란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생각이 많아진다. 바쁘게 살아가는 아이들이 궁금하고 예쁘게 잘 자라는 손주들이 보고 싶다. 주말에 아이들이 다녀갔는데 벌써 보고 싶으니 정말 못 말린다. 올 때 반갑고 갈 때는 더 반갑다는 말을 실감하면서도 가면 보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다. 온다고 하면 뭐라도 맛있게 만들어서 먹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머릿속은 온통 음식으로 꽉 차있다. 냉동고에 얼려 있는 재료를 하나 둘 꺼내 녹인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주로 준비하는데 이번에는 데리야끼 치킨과 불고기와 게장 무침을 한다. 청포묵을 만들고 호박전과 군만두를 만들고 깻잎 장아찌를 비롯한 준비된 밑반찬을 꺼내 놓으면 된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돼지 수육은 이번에는 준비가 되지 않았지만 대충 준비하여 맛있게 먹는 것을 보니 좋다. 여유로 만들어서 먹고 남은 음식은 아이들에게 써주어 집에 가서 한 끼 때우면 된다. 나야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후다닥 만들면 되지만 아이들에게는 한 끼를 때우는 것이 큰일 일 수도 있다.
무엇이든지 준비를 하며 사는 나와는 다르게 아이들은 먹을 것이 있으면 집에서 밥을 먹고, 없으면 외식을 하며 살기 때문에 냉장고는 늘 비어있다. 쌓아놓지 않고 간단하게 사는 아이들이기 때문에 어쩌다 집에 오면 이것저것 싸 주게 된다. 아무래도 외식을 자주 하면 돈도 돈이지만 건강상 집밥이 좋을 것 같은데 아기들과 바쁘게 살다 보면 밥을 해 먹기 힘들 것이다. 그까짓 거 전기밥솥에 밥 올려놓고 밥 되는 동안 반찬 서너 개 만들어 먹으면 돈도 절약하고 맛도 있을 텐데 하며 이해를 못 했는데 지금은 손주들과 전쟁하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백번 이해가 된다.
내가 아이들 나이일 때 나는 어떻게 살았는지 되돌아본다. 연년생으로 세 아이들을 키울 때는 정신이 없었다. 아이들 시중 들어주다 보면 나중에는 밥을 먹었는지 조차 모른다. 말썽 피는 것을 보면 웃음이 나고 아이들이 피곤해서 징징대면 일일이 품에 안아서 재우다 보면 나도 모르게 아이들 곁에서 잠이 든다. 그때는 요즘처럼 어린이 집이 흔하지 않고 세 아이를 맡기기에는 엄청난 돈이 들었다. 경단녀가 되더라도 집에서 육아를 할 수밖에 없어 6년이라는 세월을 집에서 아이들과 지냈다.
6년 사이에 세상은 변하고 오자마자 일을 하며 돈을 번 친구들은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집에서 6년 동안 살림만 하던 나는 영어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영어가 어느 정도 되어갈 때, 아이들도 조금씩 자라서 직장을 잡아 일을 하기 시작하며 이민 생활이 안정되어 갔다. 열심히 일을 하고 아이들은 성장하며 오늘을 만났다. 세월 따라 살아온 날이 수십 년이 되다 보니 아이들은 결혼하여 그때의 나처럼 바쁘게 살아간다. 세상이 좋아져서 잘 살아가는 데 바쁜 것은 마찬가지다. 세월을 따라 사는 것은 누구나 똑같다. 아이를 낳아 기르다 보면 언제 세월이 갔는지 모른다.
하늘은 심심한지 구름을 데려다 놓고 숨바꼭질하며 논다. 구름은 또 바람을 불러 놓고 나무는 바람 따라 흔들거리며 새들과 논다. 뜰에 여러 마리 까치가 놀러 와서 한가한 시간을 갖는다. 담에도 앉고 피크닉 테이블을 오르내리며 논다. 아마도 좋은 소식이 올 것 같다. 온도가 내려가서 따스한 햇살을 쫓아다니며 논다. 나도 덩달아 양지쪽으로 걸어본다. 햇볕이 따뜻하다. 어제오늘 영상 15도 아래로 내려가서 한 뼘 정도 자란 오이가 밤에 얼을까 봐 땄다. 혹시 모를 서리가 올까 봐 걱정을 했는데 아침에 나가 보니 다행히 서리는 오지 않았다.
사람 사는 게 매일매일이 아슬아슬하다. 멀쩡 하던 곳에 지진이 오고 허리케인이 와서 쑥대밭을 만드는 기후변화에 놀란다. 한국 뉴스를 들어 보니 지난번 폭풍 때 입었던 수해 복구작업을 하기도 전에 또 다른 태풍이 불어온단다. 하루하루 살얼음 판에 살고 있는 것 같다. 하늘이 저렇게 파랗다가 언제 또 먹구름이 몰려올지 모른다. 가을이 익어가는 것처럼 기후도 안정이 되어 이변이 없기를 바라본다. 매일 희망하고 매일 실망하고 산다. 바라고 체념하며 또 바라며 산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하루는 왔다 간다. 이렇게 하루를 맞고 보내는 날들이 쌓이다 보면 어느 날 내일이 오지 않는 날이 올 것이다. 시시한 날이든, 특별한 날이든, 나를 만나러 오는 하루가 있기에 다행이다. 빨갛게 익은 사과들이 땅에 떨어진다. 세상에 나온 모든 만물은 그렇게 사라져 가는 진리 속에 오늘도 나의 길을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