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일상에 길들여져 가는 나

by Chong Sook Lee



천천히 사는 것이 일상이 된 지 5년이 넘었다. 은퇴 후 갑자기 달라진 일상에 안절부절못하던 기억이 난다. 발바닥에 불이 날 정도로 뛰어다니던 삶에서 일거리를 찾는 삶이 되고 이렇게 살아도 되나 했다. 하루를 시시하게 보내는 것 같아 괜히 할 일을 찾아 하며 미안해했는데 이제는 노는 게 일상이 되어 아무렇지도 않다. 미안하기는커녕 당연하다는 생각으로 천천히 느리게 하루하루 만끽하며 산다. 힘들어도 괜찮다며 참고 견디던 시절이었는데 지금은 힘들지 않게 편안하게 산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한가한 시간을 살다 보니 하루하루가 좋다. 바쁘게 살아온 그 시간들의 기억은 꿈을 꾼 것처럼 희미하게 사라져 버렸다. 옆을 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보지 못하고 스쳐버린 게 너무 많다. 마치 급속으로 달리는 기차를 타고 간 기분이다. 눈에도 기억에도 남은 것이 별로 없이 살아온 것 같다. 천천히 볼 것 보고 만날 사람 만나며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지금이 너무 좋다. 가족을 위해 돈을 벌기 위해, 아침부터 밤까지 열심히 산 것은 잘한 일이지만 자신을 위한 삶은 마음에 여유를 가져다준다.


각자 지고 갈 짐이 있듯이 자신의 삶을 사랑할 권리도 있음을 느낀다. 급하게 할 일도 없고 꼭 만나야 할 사람은 집으로 초대하며 편하게 만난다. 둘이 먹기 위해 세일을 찾지 않고 좋은 옷을 싸게 사기 위해 쇼핑센터를 헤매지 않는다. 오다가다 마음에 드는 좋은 것이 눈에 띄면 사고 굳이 물건을 사러 쫓아다니지 않는다. 가지고 있는 것도 넘치는데 자꾸만 채울 필요가 없다. 물건은 많고 흔한 세상이 되었는데 쓸만한 물건은 없다.


질보다 가격이 비싸면 좋다고 하는 세상이 되어 많은 돈을 주고 사도 옛날 물건만 못하다. 높은 구두나 꽉 끼는 옷 그리고 무거운 그릇이나 두꺼운 책도 싫다. 시간 있을 때 나중에 읽는다 고 사놓은 전집은 글씨가 너무 작아 안 읽는다. 무슨 일이나 때가 있다는 것을 예전에는 몰랐다. 언젠가는 가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만은 예외인 줄 알았다.


단풍이 볼만한데 자꾸만 떨어지는 게 너무 아쉽다. 거리에 단풍잎이 곱게 물들어 아름답다고 했더니 어제저녁에 불어온 바람으로 많이 떨어졌다. 낙엽이 거리를 헤매며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잠시라도 머물며 쉴 곳을 찾는 것 같다. 건너편 건물에서 일하는 사람이 나뭇잎을 기계로 낙엽을 불어 모은다. 옛날 어릴 적에 읽었던 '낙엽을 태우며'라는 수필이 생각난다. 낙엽 타는 냄새가 날 것처럼 멋지게 써 내려간 글이 좋아서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른다.


모여진 낙엽은 커다란 봉투에 담겨 어디론가 실려 간다. 낙엽 태우는 구수한 냄새를 맡은 지 오래되었다. 가을이 세월 따라 가버려도 추억만은 남는다. 가까이 사는 둘째 아들 집에서 가까운 곳에 아담한 숲이 하나 있다. 손주들과 걸어도 무리가 없는 짧고 예쁜 숲이다. 주말이라서 시간을 내어 손주들과 천천히 걸어본다. 이 아름다운 가을이 가기 전에 숲의 품에 한번 더 안기고 싶다.


파란색 물이 떨어질 것 같은 하늘이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곳을 걷는다. 나무들이 키재기를 하듯 하늘을 향해 기지개를 켠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카메라 셔터를 계속 누른다. 보고 또 봐도 한없이 예쁜 단풍잎이 가슴을 설레게 하여 마음은 청춘으로 돌아간다. 손주들과 함께 하는 산책은 늘 정겹다. 볼 때마다 몰라보게 훌쩍 자라는 손주들이 더 크기 전에 더 자주 만나고 싶다. 뛰고 걷고 하다가 싫증 나면 집으로 가면 된다. 오래도록 함께 하고 싶지만 가고 싶을 때 언제라도 집에 갈 수 있다는 것을 알면 마음이 편하다. 한동안 열심히 걸어 배가 고프면 사탕이나 초콜릿을 주면 좋아한다. 간식을 하며 집으로 가는 길은 기쁘다.


손주들과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잠깐 슈퍼에 들렸다. 물건이 의외로 많이 들어왔는지 여러 가지 세일을 많이 해서 '이게 웬 떡이냐' 하며 여유로 많이 사 가지고 들어왔더니 기분이 좋다. 세일하는 곳을 쫓아다니지 않고 우연히 들렸는데 좋은 가격으로 물건을 산다 는 것은 역시 기분 좋은 일이다. 노인 연금 외에 수입이 없는 우리로서는 좋고 싱싱한 물건을 싸게 사는 것도 돈을 버는 것과 다름이 없다.


물건을 살 때 조금 비싸게 사면 손해를 본 것 같고 조금 싸게 사면 기분이 좋다. 집으로 곧장 왔으면 무슨 세일을 하는지 모를 텐데 잠깐 들린 곳에서 행운을 만난 것 같다. 이처럼 사람들은 조그만 것에 실망하고 작은 것에 행복을 찾는다. 눈을 돌릴 수 없이 아름다운 가을이지만 낙엽이 바람 부는 대로 거리에 뒹구는 모습에 괜히 마음이 쓸쓸해진다. 토끼가 앞뜰에 앉아서 단풍잎 떨어지는 나무를 무심코 바라본다. 바라보는 눈길이 다가오는 추운 겨울을 걱정하는 것 같다.


추운 겨울에 스타일 구길까 봐 내의도 안 입고 얇은 스타킹을 신고 멋 부리던 젊은 날은 낙엽 따라 가버렸다. 지금은 조금만 추워도 두꺼운 옷을 꺼내 입으며 엄살을 부린다. 가을이 가면 또 다른 봄이 오기에 겁낼 것 없다. 천천히 오는 세월을 받아들이며 살면 된다. 급할 것도, 서두를 것도 없는 느린 일상에 나는 점점 길들여져 간다.


행복은 어쩌면 이런 여유로움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음식도 오래 씹으며 음미할 때 몸에 좋다고 한다. 바쁘게 보낸 하루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나를 보상받은 것 같다.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진리를 실감한다. 따스한 햇살이 쏟아지는 한나절에 잔잔한 평화를 만난다.


(그림:이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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