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어디로 마실을 갔는지 세상은 조용하다. 나무들이 꼼짝 않고 서 있다. 강가에 아직 남아 유혹하는 가을을 만나러 간다. 풀에 맺힌 이슬은 물이 되어 땅으로 떨어진다. 가을은 눈으로만 보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숲 속을 걸으면 풋풋한 가을 냄새에 취한다. 낙엽을 밟으면 왠지 모를 구수한 냄새가 나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 서늘한 공기가 코를 스친다. 이른 아침에는 밤새 내린 이슬로 풀잎이나 나뭇잎이 촉촉이 적셔 있다. 부지런한 새들은 햇살이 비추어 이슬이 말라버리기 전에 아침 일찍 목을 축인다. 완벽한 가을이다. 강물은 조급하지 않고 천천히 흘러간다.
한가한 오리와 갈매기는 강가에 앉아 헤엄을 치며 무언가를 잡아먹는다. 추운 겨울이 오기 전에 몸보신을 하는 것 같다. 햇살이 내리쬐는 남쪽 강가는 단풍이 곱게 들어 있어 눈이 부신다. 기가 막힌 경치에 감탄을 하며 사진을 몇 장 찍고 앞으로 걸어간다. 오늘은 다리를 건너서 걸어가다 다른 다리까지 걸어가서 돌아오는 코스로 정했다. 적어도 2시간 반을 걸어야 하는데 무릎이 견뎌줄지 모르겠다. 60여 개의 층계를 걸어 올라가서 다리를 건너간다. 사방에 가을이 노랗게 불타며 익어간다.
오늘 아침에 잠깐 망설였는데 역시 오길 잘했다. 날씨가 좋아서 사람들이 많이 걷는다. 강에서 뱃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여럿이다. 바람도 자고 물결도 잔잔하다. 열심히 노를 저으며 뱃놀이를 하는 그들의 모습이 활기차다. 마침 추수감사절 연휴라서 가족끼리 만나는 시간이다. 여기저기서 개들은 신나게 뛰어놀고 지나치는 사람들은 서로 인사하며 걷는다. 저마다 다른 모습을 하고 서있는 자연이 볼수록 참으로 신비롭다. 가늘고 긴 나무가 있고 하늘로 쭉 뻗어 자라는 나무가 있다. 죽어 넘어진 나무 위에 기대고 자라는 나무가 있고, 죽은 지 오래된듯한 나무인데 쓰러지지 않고 버티고 있다.
인간이나 자연이나 각자 다른 모습으로 세상에 나와 각자 재능에 따라 할 일을 하다가 떠난다. 크고 작고, 굵고 가늘게 최선을 다하여 최고의 모습을 보여 준다. 하늘은 푸르고 강물에 비친 햇살이 눈부시게 반짝인다. 보트가 물을 가르고 지나면 파도가 넘실 대며 강변 모래 위로 몰려온다. 오솔길을 걷는 사람이 있고 강변 모래를 걸어가는 사람도 많다. 아득하던 다리가 가까이 보인다. 다리 아래로 난 길을 따라 사람들이 개를 데리고 강가로 몰려간다. 다리를 건너가는데 기러기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남쪽으로 날아간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도 때가 되면 오고 간다.
먼 길을 떠나기 아주 좋은 날이다. 더 추워지기 전에 떠나야 하는 것을 그들은 안다. 지난봄에 이곳에 너무 일찍 온 기러기들이 추위에 떨던 생각이 난다. 유난히 늦게 온 봄에 눈까지 내려서 기러기들이 오도 가도 못하였는데 다행히 여름 날씨가 좋아 덜 미안했다. 그렇게 고생하던 기러기가 이곳에서 가정을 이루며 여름을 보내고 가족을 이끌고 남쪽으로 가는 행렬은 길고 고달프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해 그들은 또다시 먼 길을 떠난다. 가을이 다 가기 전에 나온 산책길은 그야말로 환희 그 자체다. 단풍잎이 다 떨어진 나뭇가지 꼭대기에 앉아 있는 까마귀도 가을이 예쁘다고 깍깍댄다.
강물에 빠져버린 하늘이 강물과 한 몸이 되어 하염없이 흐른다. 해마다 몇 번씩 오는 곳이지만 올 때마다 새롭다. 지난봄에 보았던 키 작은 나무가 몰라보게 훌쩍 자라 있다. 강 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비바람에 깎여 많이 좁아져 간신히 걸어간다. 바이커들은 길이 위험할수록 더 좋아하여 길은 더 많이 깎인다. 오르고 내려가며 흐르는 강물을 바라본다. 어디부터 흘러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른다. 아주 작은 물줄기가 모이고 모여서 강을 이루고 어느 날 강물은 바다로 나갈 것이다. 바다는 또 다른 곳으로 흘러가며 수없이 많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 들은 흩어지고 모이는 구름을 닮았다. 구름 한 점 없던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놀러 와서 멋진 그림을 그려놓는다. 갈매기들은 강기슭에서 한가롭게 놀고 개들은 산책길을 뛰어다니는 평화로운 하루다. 보너스 같은 아름다운 가을을 만끽하며 원 없이 걸어 본다. 급할 것도 없고 빨리 가야 할 이유도 없다. 산책길에는 군데군데에 의자가 놓여 있다. 아무도 걷지 않는 깊은 숲 속에도 놓여 있고, 커다란 나무 아래에도 의자가 놓여 있다. 강물 따라가는 길을 걸어가노라니 호젓한 강가에 의자 하나가 강물을 바라보고 있다. 세상을 떠난 누군가의 가족이 사랑하는 이를 기리며 놓아둔 의자다. 짧은 일생을 살고 떠난 사람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고 잠시 앉아서 쉬며 감사함을 전한다.
천천히 구경하며 오솔길을 따라가는 마음은 마냥 행복하다. 어제의 내가 아니라도 그냥 좋다. 발목까지 덮는 낙엽을 밟으며 걷다 보니 처음 건너온 다리가 보인다. 무릎이 아프면 어쩌나 하고 걱정을 했는데 피곤 하지만 무릎 통증은 없어서 다행이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 라고 유람하듯 구경하며 걸은 2시간 반의 산책이 끝났다. 한없이 걷고 싶지만 또 다른 날을 기약하며 집으로 향한다. 살다 보면 오늘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있고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이 많다. 그때 할 걸 하며 후회하지 않기 위해 오늘 할 일을 미루지 말아야 하는데 살림은 언제 하려고 놀러만 다니는지 모르겠다. 신나게 놀고 열심히 일하며 내일도 오늘처럼 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