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한 아침이다. 아침을 먹고 가까운 동네 한 바퀴를 걸어본다. 집은 많은데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단풍이 예쁘게 들은 나무들 사이로 고운 햇살이 비춘다. 혹시 추울까 걱정을 했는데 완벽한 날이다. 바람이 선선하게 불고 차들이 오고 가는 한적한 아침에 동네 옆에 있는 작은 공원으로 발길을 옮긴다. 아기자기하다. 새집이 나무에 걸려있고 작은 책방이 서 있다. 필요 없는 책을 가져다 놓고 책이 필요한 사람은 가져간다. 혹시 필요한 책이 있나 열어보고 잠시 구경한다. 참 재미있다.
수국이 활짝 피어있고 단풍나무가 새빨갛게 물들어 있다. 작은 벤치가 정원에 놓여있어 잠시 앉아본다. 너무 아름다운 공원이라 마치 내가 영화 주인공이 된 것 같다. 벽돌 모양의 아치가 있다. 누군가의 결혼식 할 때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온갖 나무와 꽃이 어우러져 사는 공원을 빠져나와 계곡을 향한다. 물이 잔잔하게 흐르고 커다란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고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다람쥐가 급하게 나무를 오르내리고 물가에는 블랙베리 나무가 숲을 이룬다.
아직 익지 않은 블랙베리가 빨갛게 나무에 매달려 있다. 라즈베리인 줄 알고 하나를 따 보았는데 딱딱하다. 안 익은 블랙베리를 한번 깨물어 먹어보니 엄청 시어서 뱉어 버렸다. 올해는 날이 뜨겁지 않아서 아직 익지 못하고 가을을 맞는단다. 익을 때를 놓친 것 같다. 사람이 기회를 놓치면 피지 못한 채 늙어가는 것처럼 자연도 마찬가지다.
파란 하늘에 기러기들이 길게 줄을 지어 남쪽으로 날아가는 행렬이 보인다. 길이 너무 길어 날아가는 모습을 한참 올려다보았다. 오면 가고 다시 또 오는 것이 자연의 섭리다. 계곡에 빠져 누운 낙엽들이 물길을 따라 어디론가 흘러간다. 가는 곳을 알지 못해도 그냥 간다. 한 해 동안 할 일을 다했으니 가는 것이다.
웅장한 나무들이 하늘로 쭉 뻗어 자라 있고 하얗고 노란 작은 들꽃들이 여기저기 피어있다. 가을인데 가을 같지 않고 다시 봄이 오는 것 같은 이곳의 가을이다. 비가 오기 시작하는 11월에는 다시 새 잎이 나고 잔디가 파래진다. 겨울이 겨울 같지 않게 지나가고 2월이면 벌써 벚꽃이 피기 시작하고 연이어 모든 꽃들이 꽃망울을 터트리며 3월이면 꽃 잔치를 한다.
봄이 너무 추워서 왔다 간 줄도 모르게 다녀가는 곳에 사는 나는 이곳의 꽃들에 반한다. 가을인데도 집집마다 화단에 꽃들이 많이 피어있고 들판은 파랗다. 나는 다가올 겨울을 걱정하는데 이곳 사람들은 다가올 봄을 준비한다. 여름 동안 피고 지고한 지저분한 정원을 정리하고 새로운 봄을 기다리는 이곳의 가을이다.
올 때마다 새롭다. 처음 몇 번은 이곳이 너무 좋아 당장에라도 이사를 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자주 오다 보니 이사 와서 사는 것도 좋지만 자주 놀러 오는 것도 좋은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겨울이 긴 에드먼턴은 추위를 피해 따뜻한 곳으로 가서 겨울을 내고 오는 사는 사람들이 많다. 먼 곳에 여행을 가는 것보다 딸이 사는 가까운 이곳으로 오면 된다.
여행이란 집을 떠나 어딘가 멀리 가는 것이긴 하지만 가까운 곳에도 보지 못하고 스친 것들이 많다. 집 앞에만 나와도 볼 것 천지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재미있다. 얼굴이 다르듯 사는 모습도 다르다. 손으로 꾸민 것도 좋지만 자연을 따라갈 수 없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섬이지만 육지 같다. 곳곳이 모두 아기자기하고 아름답다. 잠깐 다녀가는 곳이라서 좋아 보이는지 모르지만 자꾸만 정이 든다.
하늘은 파랗고 세상은 평화롭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이 6개월씩 이어지고 금리가 급상승한다.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사람들은 살기가 점점 어렵다고 하는데 이곳은 그저 평화롭기만 하다. 정치하는 사람들의 정권다툼으로 싸우는 소리도 안 들리고 자연과 인간이 사이좋게 산다. 가까이 보면 더 많은 것을 보게 되겠지만 여행객으로 살다 가고 싶다.
사슴이 주인행세를 하며 유유히 거리를 걸어 다니고 밤을 닮은 마로니에 열매가 땅에 떨어져 쌓여있다. 영락없이 밤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독성이 있어 먹지 못한다. 빨갛고 노랗게 익어가는 나무들이 햇살을 받아 찬란하다. 딸네 집 가까운 곳에 한국교회가 보이고 앞에는 작은 도서관이 서 있다. 어떤 책이 들어 있나 살짝 열어보니 반갑게도 한국 책이 몇 권 있다. 고향 사람을 만난 듯 반갑다.
좋은 것 보고 좋은 생각 하며 추억만 남기고 싶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알기를 바라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다가서서 오래도록 사랑하고 싶다. 어느 날 누군가 다시 오고 싶은 곳을 물어보면 이곳이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