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이 가고 12월이 온다. 밤새도록 오는 눈이 여전히 내려 쌓인다. 그동안 날씨가 좋아 눈이 녹으며 지저분해졌는데 하얀 눈이 내려 덮어주니 깨끗하다. 눈을 잔뜩 안고 있는 하늘과 하얀 눈이 덮인 땅은 동색이다.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땅인지 구분이 안된다. 땅과 하늘은 서로 맞붙어 손을 잡고 있다. 아름다운 10월을 보내고 서운한 마음에 우울해질 때 갑자기 찾아온 겨울은 눈으로 세상을 하얗게 덮었다. 너무 일찍 찾아온 겨울이 야속한 마음으로 겨울을 맞았다. 심술궂은 겨울이 햇살의 방해로 떠나가고 11월은 다시 남은 가을을 가져다주었다.
겨울도 아니고 가을도 아닌 11월은 어쩌면 겨울이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심어 주었다. 눈이 오지 않는 겨울은 특별한 보너스이다. 오래전, 겨울이 무척 가물었을 때,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12월 하순이 되었는데 눈이 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아니고 브라운 크리스마스가 될 거라며 은근히 눈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결국 눈이 오지 않았다. 눈이 없는 거리는 크리스마스에 이색적인 풍경을 보여주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도로를 질주하는 사람이 있고 반바지를 입은 사람도 여럿 보면서 겨울이 겨울 같지 않아 놀랬던 적이 있다.
아름다운 단풍잎을 즐길 수 있는 따뜻한 11월은 일찍 온 눈 덕분에 예쁜 눈꽃을 구경할 수 있었다. 나무 가지 위에 소복이 쌓인 하얀 눈을 보고 있으면 마음은 어릴 적 읽던 신비스러운 동화 속으로 돌아간다. 앞뜰에 있는 소나무 앞에 어제저녁에 다녀간 토끼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있다. 까치와 참새들이 날아와 노는 시간인데 눈이 와서 어딘가에 앉아서 내리는 눈을 쳐다보고 있는지 조용하다. 오고 가는 차도 없고 동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것처럼 조용하다. 33년 전, 처음 이 동네로 이사 왔을 때는 집집마다 꼬마들이 많아서 사람 사는 동네 같았는데 지금은 너무나 한적하다. 아이들 또래들이 다 자라서 독립을 하고 노인들만 남아서 동네를 지킨다.
세월 따라 나무들은 굵어지고 젊었던 사람들은 오래된 집처럼 조금씩 변해간다. 해마다 오는 가을은 11월이 갈 때 같이 간다. 아무리 추워도 가을은 가을이고 아무리 따뜻해도 겨울은 겨울이다. 가는 11월은 잡지 못한 채 보내고, 오겠다 는 12월은 막지 말고 반갑게 맞아야 한다. 세월은 세월의 할 일을 하고 나는 나의 일을 하면 된다. 눈이 오고 체감온도는 영하 28도라고 한다. 오늘 같은 날은 벽난로에 장작을 때면서 겨울을 만끽해야 한다. 어차피 겨울이 왔다가야 봄이 오고 봄을 맞기 위해서는 겨울을 잘 보내야 한다. 바람 따라 급하게 하강하여 내리는 눈이 시야를 가린다. 집안에서 바라보는 설경은 참으로 아름답다.
11월이 가고 12월이 오는데 왠지 편안한 내 모습 같아 보인다. 가지 않으면 올 수 없고 보내야만 맞이할 수 있음을 배운다. 수많은 세월을 맞고 보내고 차분한 노년의 삶을 산다. 세월은 사람을 변하게 한다. 몸과 마음이 옛날 같지 않다. 아무리 피곤해도 해야 할 일을 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던 마음이 없어진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소중하고 의미가 있다. 작은 것도, 못생긴 것도,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도, 세상에 나온 이유가 있다. 겨울에 눈이 오고 바람이 부는 이유는 새봄을 맞기 위한 몸부림이다. 여름에 무성한 나뭇잎은 열매를 맺기 위함이고 가을에 색이 변하는 것은 할 일을 끝내고 떠나는 과정이다.
오면 가고 가면 또 다른 모습으로 돌아온다. 조상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고 후손들이 있다. 봄은 여름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가을은 겨울을 데려다 놓고 떠난다. 사람들은 봄을 기다리며 겨울을 보내고, 봄이 온 줄도 모른 채 봄을 떠나보낸다. 행복을 찾아 한평생 헤매다가 행복은 마음속에 있음을 배운다. 꽃 한 송이에도 행복이 있고, 따스한 국 한 그룻에도 행복이 있다. 삶은 흘러가는 강물이다. 겨울에 강물이 얼어붙어도 얼음 밑으로 여전히 흐른다. 삶이란 글을 풀어보면 사람이라는 글자로 보인다. 좋은 사람들 옆에 있으면 괜히 덩달아 사람이 선해지는 것을 느낀다. 괴롭다 생각하면 고통스럽고 그런대로 괜찮다 생각하면 견딜 수 있다. 겨울이 온 것은 봄이 오고 있다는 말이다.
11월은 가고 12 월이 오면 머지않아 춘삼월도 오고 꽃도 필 것이다. 세월이 와도 좋고, 가도 좋다. 가는 세월 후회 말고 오는 세월 원망 말자. 눈이 펑펑 쏟아진다. 세상이 티 하나 없이 깨끗하다. 벽난로의 불길이 빨갛게 타오르고 고구마가 익어간다. 군고구마의 구수한 냄새가 집안으로 퍼진다. 가장 단순하고 가장 소소한 하루가 간다. 먹고 놀고, 드라마 보고 낮잠 자며 보내는 삶이 좋다. 꼭 가야 할 곳이 없어도 좋고,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없어도 좋다. 이렇게 뒹굴거리며 살기 위해 퇴직한 것인데 맘껏 즐기자. 하릴없이 빌빌대는 늙은이가 되어보자. 이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산속에 들어가서 사는 자연인같이 모든 것을 초월하고 살면 평화도 온다. 11 월아! 잘 가라. 내년에 또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