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은 곱고 따뜻한데 바람은 차다. 봄은 봄인데 봄 같지 않아 두꺼운 코트를 벗지 못하고 걷는다. 작은 꽃들이 피기 시작하더니 개나리가 만개하고 벚꽃도 피기 시작한다. 이번 주말이 지나면 만개할 것 같다. 아직은 꽃 세상은 아니지만 봄은 봄이다. 사람들은 추워도 얇은 옷으로 갈아입고 가볍게 걸어가고 운동하며 뛰는 사람도 많아졌다. 이제 동네가 눈에 익기 시작했는데 다음 주면 딸의 산후조리를 끝내고 집으로 간다. 손자가 태어나려고 신호를 보내고 딸은 진통과 출산의 고통을 겪으며 새 생명이 태어났다. 딸은 엄마로 사위는 아빠로 다시 세상에 태어났고, 남편과 나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되었다. 외손자가 세상에 나오며 또 다른 호칭을선물로 받았다.
손자가 태어난 지 보름이 넘고 아기도, 부모도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고 있다.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었는데 공부를 하며 육아를 하나 둘 익혀 나간다. 두 주먹 불끈 쥐고 넓은 세상에 나온 아기와 아기를 키워보지 않은 부모는 매사가 새로운 경험이다. 잠자는 아기는 한없이 예쁜데, 울며 보챌 때는 이유를 몰라 어쩔 줄 모른다. 유튜브를 보고 구글에 물어보고 주위 친구들에게 조언을 들으며 하나둘씩 실천하며 익혀나간다. 딸과 사위가 부모가 되어가는 과정이 눈물겹기까지 하다. 임신하고 아이만 낳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힘든 출산 과정을 거쳐 아기가 세상에 나왔는데 모르는 것투성이다.
그나마 내게 조금 남아있는 육아 상식이 도움이 되는 것이 있어서 다행이지만 이유 없이 울어대는 손자를 안고 왔다 갔다 하며 걸어본다. 무엇이 손자를 불편하게 하는지 눈을 감고 있어도 깊은 잠을 자지 못한다. 자는 것 같아서 뉘면 다시 칭얼거린다. 젖이 모자라서 그런가 하고 젖을 먹이면 젖을 빨다가 바로 잠에 곯아떨어진다. 잠이 오는데 잠을 못 자고 깨어 보채고, 밤새 잠을 설치는 딸과 사위가 트림을 시키는 방법을 찾아내고 쪽쪽이를 이용하며 조금씩 나아진다. 무언가 위로를 받는지 쪽쪽이를 빨다 자다 하며 잠이 든다. 아기를 위해 만든 것이 부모에게도 도움이 된다.
아기가 잠을 잘 자고 덜 보채서 부모도 덜 피곤하게 되니 일석이조다. 내가 우리 아이들을 키울 때는 세 아이들이 쪽쪽이를 거부했는데 손자는 좋아하는 것 같아 다행이다. 딸이 아기를 돌보며 정성을 다하는 것을 보며 "어머니 마음"이라는 노래가 생각나서 눈물이 날 뻔했다. 구구절절 이어지는 노래 가사는 부를 때마다 가슴에 닿고 눈물이 난다. 그토록 애지중지하며 자식을 위해 살아가는 엄마들은 하느님 대신이다. 세상의 모든 엄마는 위대하다. 세월이 흘러 어떻게 세 아이들을 낳고 길렀는지 기억이 많이 없어졌어도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하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해 주고 싶고, 아이들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다. 아이들이 힘들어하면 가슴이 아프고, 부족한 것이 있으면 다 주고 싶다.
자식들에 대한 나의 마음처럼 아이들도 그들의 자식들을 위한 일이라면 다 들어주며 사는 것을 보며 사랑은 변하지 않는 영원한 유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만나 세상에 나오고 누군가를 사랑하며 이어지는 인류의 번식이다. 작은 몸으로 꼬물거리며 하는 온갖 행동들은 신비롭기까지 하여 보고 또 본다. 부모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고, 나는 나의 자식을 사랑하고, 아이들은 그들의 자식을 사랑하며 세상은 돌고 돈다. 계절이 오고 가고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것은 부모의 자식 사랑일 것이다. 봄이 오면 머물다가 여름에게 자리를 내주고 봄은 떠나듯이 부모도 어느 날 자식 곁을 떠난다.
인간도 계절처럼 갔다가 다시 온다면 좋을 텐데 한 번으로 끝나는 인생이다. 한없이 사랑하고 후회 없이 살다가야 하는데 걱정 근심으로 잠을 못 자고 실망과 절망 속에 헛되게 흘러가는 세월이 있다. 산다는 것이 마냥 좋기만 하다면 재미가 없겠지만 매사에 신경을 쓰며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무엇이 우리를 살게 할까? 기쁨일까 아니면 고통일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서울은 재미있는 지옥이고 이곳은 재미없는 천국이라는 말을 한다. 너무 평화롭고 모든 것들이 준비된 나라인 것 같아 하는 말인데 따지고 들어가 보면 허점도 많고 여러 가지 문제점도 많다.
남은 잘 사는 것 같고 나만 문제가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이 많다. 남의 문제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모두 좋아 보이지만 문제없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봄이 오기 위해 몸부림치듯이 사람들도 힘들지만 참고 산다. 삶이란 계절처럼 따뜻한 봄과 함께 뜨거운 여름을 살고, 익어가는 가을을 통해 춥고 어두운 겨울을 살아내야 한다. 내가 사는 곳은 겨울이 길어 해마다 봄이 늦게 오기 때문에 봄을 기다리다 여름을 맞는다. 봄이 오지 않을 것 같아도 봄이 와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봄이 떠난 뒤 일 때가 많다. 우리가 행복하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이미 우리는 행복 속에서 사는 것임을 늦게 깨닫듯이 말이다. 늦게나마 부모가 된 딸과 사위 그리고 새로 세상을 만나러 나온 외손자가 따뜻한 봄과 같은 행복 속에 살아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