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왔다. 한 달 만이다. 딸의 산후조리를 하기 위해 집을 떠날 때는 생각이 많고 걱정이 많았는데 어느덧 시간이 갔다. 딸과 사위 그리고 외손자와의 생활에 적응이 되고 정이 들어 같이 살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단지 나의 생각일 뿐이다. 아이들은 내 도움에 감사하면서도 나름대로 불편했을 텐데 서로를 맞추며 잘 넘어갔다. 오기 이틀 전에 남편이 외손자를 만나러 딸네 집에 와서 며칠 아이들과 함께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기 낳은 지 한 달이 다 되어 딸의 건강이 많이 좋아졌어도 아기가 이유 없이 울면 쩔쩔매며 어쩔 줄 모르는 딸과 사위를 보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도 잘하려니 믿고 떠나왔는데 집에 오니 마음이 편하다.
아이들이 사는 방법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적응하는 시간이 걸렸다. 살림이 손에 익지 않고 입맛이 달라 어리둥절하다 보니 적응이 되었다. 세끼를 꼬박 챙겨 먹어야 하는 우리와 달리 젊은 애들은 커피 한잔 마시는 것으로 아침을 해결한다. 밥을 좋아하는 우리와는 달리 빵이나 간식으로 끼니를 해결한다.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되어 힘들었는데 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음을 배웠다. 꼭 밥을 먹지 않아도 영양 있는 간식으로 식사를 대용하는 것이 오히려 바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가 아닐까 생각을 하며 나도 바꾸어보니 의외로 든든하고 속도 편했다.
아이들과 함께 살아 보니까 내 생각과 내 방법이 맞는다는 생각은 접어 두는 게 좋다는 것을 많이 배웠다. 시대가 바뀌고 생각이 변하는데 나의 생각만 고집하면 아이들과 마찰이 생기고 같이 살 수 없다. 아이들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이나 아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에게 더 많은 발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살아온 삶은 어쩌면 내 삶이 아니고, 내 생각이 아닌 부모님의 생각과 부모님의 삶을 살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무엇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세상은 너무나 달라지고 있다. 내가 믿고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일지도 모르고, 그대로 산다면 어쩌면 아이들과는 거리가 생길지도 모른다. 하루가 됐던 한 달이 됐던 같이 사는 동안 그들에게 맞춰주고 이해하고, 그들이 사는 방법을 따라 하다 보면 나에게도 도움이 되고 배울 것이 많을 것이다.
한 달 뒤면 남편과 결혼한 지도 45년이 된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서로 닮아 가고 있다. 남남이 만나서 45년을 살아가다 보니 좋아하는 것은 닮아가고 내가 싫어하는 것은 맞춰가며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다. 아이들이 집을 나가 독립하여 나름대로 그들의 삶을 산 지 어느새 20년이 되어가기 때문에 내가 그들의 삶을 바꿀 수 없다. 한 공간에서 부모 자식이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은 그들을 존중하며 그들의 삶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간섭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듯이 아이들이 우리 집에 오면 우리 집의 규칙을 따르고 내가 아이들 집에 가면 나는 아이들의 살아가는 방법을 따라야 한다.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단지 나만의 생각일 뿐 인간은 모두 다른 생각을 하고 산다. 오랜만에 아니 처음으로 딸 부부와 오랫동안 시간을 함께 하며 많은 것을 배운다. 자식은 품 안에 있을 때 자식이라고 하시던 부모님 말씀이 생각난다. 엄밀히 따지면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나와 다른 인격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자식의 삶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살고 나는 나의 삶을 살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다. 가까이 산다고 서로 참견하고 간섭하면 거리가 더 멀어진다. 무관심이 오히려 지나친 관심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개인의 자유가 중요시되는 세상에 부모 자식이 한울타리에서 생활하기는 쉽지 않다. 대가족 시대에 3대가 살았던 시대를 생각해 본다. 각자의 삶 보다 가족 간의 우애를 중시하며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며 살았다. 이제는 내가 살아야 세상도 산다는 말을 하며 개인의 삶을 우선으로 한다. 희생하며 사는 것이 바보 같은 삶이라 하지만 내가 산 세월처럼 나는 나의 삶을 살면 된다. 이제 나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으니 좋아하는 것을 하며 남편과 함께 남은 여생을 즐겁게 살면 된다. 하늘은 여전히 파랗고 봄은 오고 있다. 오는 길이 험해서 조금 늦더라도 봄이 오고 있음을 안다.
하루를 사랑하고 또 오는 하루와 함께하면 된다. 아이들은 아이들 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같은 곳을 바라보며 앞으로 가면 된다. 사랑은 마음으로부터 오는 강력한 힘이다.
잘한다. 애썼다. 멋지다. 사랑한다. 네가 있어 행복하다. 입에 발린 말이라도 열심히 하며 살아야 한다. 어차피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상대를 고치려고 하지 말고 내가 변하면 평화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