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을 본다. 그 많은 눈이 모두 녹고 누렇게 마른 잔디가 보인다. 지난밤에 심한 바람이 불어 눈아래 있던 낙엽을 뒤흔들었나 보다. 어디서 날아들어 왔는지 많은 낙엽들이 뒤뜰에 뒹굴어 다닌다. 가을이 남기고 간 낙엽들이 이제야 갈 곳을 찾아 방황한다. 서서히 봄청소를 시작해야 하는 때이다. 뜰이 넓어서 바비큐도 하고 손주들이 마음껏 뛰어노는 곳이기에 계절마다 신경을 쓴다.
겨울이 떠난 뜰은 일 거리 천지다. 나무가 많아 눈이 오기 전에 아무리 깨끗이 청소를 해도 늦게 떨어지는 낙엽들이 많다. 눈이 없긴 해도 땅은 아직 얼었기 때문에 며칠 더 기다려야 한다. 성급한 마음으로 부지런을 떨면 잔디 뿌리를 다친다. 햇살을 더 받고 바람이 말려 주면 자연스레 새 잔디가 나오지만 지저분하고 보기 싫어 마음이 급하다. 할 일 없으면 잠이나 자라는 말이 맞는 말이다. 괜히 일 저지르지 말라는 말이다.
어느새 봄이 오긴 왔나 보다. 마른풀을 헤집고 파릇파릇한 새싹들이 땅을 뚫고 나온다. 제일 먼저 봄을 알리는 튤립이다. 몇 년 전 튤립을 많이 사다가 심었는데 해마다 예쁘게 나오는데 작년 이맘때 춥고 눈이 많이 와서 조금씩 나오던 튤립이 많이 얼어 죽었다. 꽁꽁 얼어버린 튤립을 보며 아쉬워하고 미안했는데 올해는 날씨가 좋아 꽃을 피울 것 같다. 하찮은 꽃도 피지 못하고 죽으면 속상하다.
다년생 꽃이 많은 우리 집 화단에는 여러 가지 꽃들이 봄부터 가을까지 피고 지고 한다. 튤립이 꽃문을 열면 앵두나무와 사과나무에 꽃이 피고 이름 모르는 노란 꽃이 핀다. 질 세라 옆에 있는 밥풀꽃 나무에 꽃이 피고 개나리와 라일락이 피면 여름 장미가 꽃망울을 터트리며 늦가을까지 피고 지고를 계속한다. 그사이 텃밭에도 꽃잔치가 시작된다. 저마다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고 싶어 난리들이다.
샛노란 호박꽃이 피면 텃밭이 환하다. 쑥갓꽃 파꽃 부추꽃을 비롯하여 고추꽃이 피고 오이꽃이 피면 우리 집은 꽃동네가 된다. 꽃들도 말을 알아듣는지 예쁘다 예쁘다 하는 말을 들으면 좋아한다. 어디서 날아온 유채도 여러 개 피어나 한여름 입맛이 없을 때 비빔국수에 유채꽃 잎을 넣어서 비벼 먹으면 입맛이 돌아온다. 눈이 없어졌다고 금방 봄이 오는 것이 아닌데 뜰을 걸어 다니다 보니 어느새 내 마음은 한 여름 한 마리의 나비가 되어 뜰을 날아다닌다.
할 일이 태산인데 몸은 움직이기 싫다. 따스한 햇살이 등에 내리쬐는 봄날에 나른한 마음으로 이렇게 뜰을 걷는 것도 좋다. 달려온 세월은 한가함을 가져다주었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며 사는 재미도 괜찮다. 창조주는 인간 개개인에게 걸맞은 시간을 주었다. 짧은 시간을 받은 사람도, 긴 시간을 받은 사람도 각자 할 일을 하고 간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모르기에 좋다.
하루를 백 년같이 살고 백 년을 하루같이 살면 된다. 무엇이 정답인지 모르기에 게으름을 피우며 객기도 부린다.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살 수는 없다. 꽃이 피었다가 지면 이파리가 생기고 단풍이 들고 낙엽이 되어 떨어져 뒹굴어 다닌다. 각자의 할 일을 하는 것이다. 할 일을 다하고 가는 것도 좋지만 못하고 가면 남아있는 이들이 이어간다.
봄이 간 자리에 여름이 자리를 차지하고 가을이 떠난 자리에 겨울이 자리를 잡으며 세월 따라 떠난 계절이 이어진다. 하늘로 치솟은 사과나무 가지들이 낡은 이파리를 품고 서 있다. 언제까지 저러고 서 있을지 모른다며 걱정하는 내 마음을 알았는지 슬그머니 뜰로 나간 남편은 사과나무 전지를 해주느라 바쁘다. 나이가 들어가면 나무나 사람이나 늙은 모습을 숨길 수 없다. 여기저기 오래된 가지들이 뭉쳐있다. 적어도 50년은 넘는 사과나무를 보면 연륜이 느껴진다.
새들이 집을 짓기도 하고 쉬어 가기도 하는 사과나무인데 해마다 전지를 해 주어서 인지 많은 사과가 열린다. 늦가을 서리가 내린 후에야 단맛을 내는 종류인데 어쩐 일인지 작년에는 사과가 몇 개밖에 안 열렸다. 해걸이를 하는 것을 알기에 올해는 분명히 사과 농사는 풍년이 될 것이다. 낡고 늙은 가지도 쳐 주었으니 꽃피고 열매 맺기를 기다리면 된다. 과일 중에 사과는 손쉽게 사 먹을 수 있는 과일이지만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을 보는 재미가 있다.
가을에 눈이 펑펑 쏟아질 때 따 먹는 사과맛은 최고다. 여름 내내 새파랗게 내숭을 떨다가 가을이 되어서야 붉게 물든다. 여전히 너무 셔서 먹을 수 없다가 갑자기 오는 추위에 단맛을 내는 사과라서 더 맛있다. 봄이 오면 할 일이 많지만 그래도 좋다. 긁어주고 깎아 주며 다듬어 주면 그들도 예쁜 모습으로 보답을 한다. 자연은 결코 헛되지 않아 뿌린 대로 거둔다. 때때로 농사가 잘 안 되는 해가 있지만 땅도 쉬고 싶을 때가 있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간다.
가뭄과 홍수가 괜히 오는 것이 아니다. 자연도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가 있다. 인간은 너무나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살았다. 비료와 화학약품을 실험이라는 명목으로 오랫동안 지구를 괴롭혀 왔다. 대량생산을 위해 본연의 자연을 짓밟아서 인간에게 되돌아오는 것이다.무농약 유기농으로 농사지은 야채 비빔밥이 생각난다. 심심한 아침에 뜰을 걷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르는데 배꼽시계가 알람을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