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아침이다. 어제 하루종일 비와 눈이 사이좋게 번갈아 내리더니 오늘은 꼬리를 완전히 내리고 태양을 앞세운다. 비 온 뒤의 하늘은 찬란하다. 어쩌면 저리도 파란가? 어제 하루종일 회색 하늘로 세상을 내려다보던 하늘인데 오늘은 완벽하다. 잎이 나지 않은 나뭇가지가 비에 젖어 빗방울을 달고 흠뻑 젖어 있었는데 오늘은 세상이 뽀송뽀송하다.
하루사이에 푸르름이 더하여 생기를 머금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다. 봄이 온 곳은 꽃이 떨어지고 봄이 간다고 서운해하는데 이곳은 아직도 봄을 기다리고 있다. 늦게 오는 봄이기에 더 기다려지는 것 같다. 어차피 한번 왔다가는 봄인데 오기가 힘드나 보다. 겨울이 다가올 때는 괜스레 쓸쓸하지만 봄은 오지 않았어도 하늘만 쳐다봐도 마음이 설렌다.
봄이 온다고 별다르지 않아도 마냥 기다려진다. 어느새 땅에는 손톱만 한 싹들이 파랗게 올라오고 있다. 아무것도 없는 땅에 새 생명이 나온다. 외손자가 세상에 나온 지 6주가 되었는데 어느새 엄마를 보고 방글방글 웃는다. 젖을 주고 안아주고 재워 주는 엄마를 알아보며 웃고 재롱떠는 손자를 보고 있으면 세월 가는 줄 모른다. 물론 영상통화이지만 옛날에 내가 아이들을 낳아 기를 때와는 천지차이다. 카메라도 흔하지 않던 시대에 고작 사진 몇 장이 전부였는데 지금은 만질 수는 없고 안아줄 수는 없어도 실 시간으로 상대를 보고 이야기하는 시대가 되었다.
기다리다 보면 왔다가는 계절이 셀 수 없이 다녀갔는데도 해마다 이맘때는 괜히 밖이 궁금해서 밖으로 나가게 된다. 밖에 나가도 겨울을 벗었을 뿐인데 기분이 다르다. 어제 남편이 잘라놓은 사과나무 가지들도 치워야 하고 잔디도 긁어줘야 한다. 남편이 하는 일이지만 일거리를 보면 은근히 걱정스럽다. 나이 들어가는 남편이 힘들어하는 게 마음이 쓰인다. 한꺼번에 하려면 힘이 달려 여러 번으로 나누어 조금씩 해야 한다.
봄이 되면 겨울이 남겨놓은 쓰레기를 치우고 여름에는 봄이 주고 간 아름다운 선물을 곱게 기르기 위해 쓰다듬고 사랑한다. 여름이 가면 온갖 치장을 하며 우리를 유혹하는 가을에 홀린다. 가을단풍에 취해서 넋 놓고 있다 보면 추운 겨울이 오는 줄도 모르다 덜컥 겨울 앞에 서성이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제 추운 겨울이 떠나고 봄이 왔는 데 청소할 뜰을 보면 심란하다. 그토록 기다리던 봄이 왔는데 봄을 맞는 기쁨도 잠시 걱정이 앞선다.
남들은 하기 좋은 말로 힘에 겨우면 아파트로 이사를 가면 된다고 하지만 지금 잠깐 힘들어도 아파트로 이사 갈 생각은 아직 없다. 열흘 걸릴 것 한 달이 걸려도 천천히 심심풀이로 하면 된다. 무서울 게 없었는데 세월 이기는 장사가 없다고 이젠 일 앞에서 몸을 움츠리게 된다. 햇살은 눈부시고 바람은 조용하다. 어제 온 비로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았는데 공기는 신선하다.
가슴을 활짝 펴고 긴 호흡을 해본다. 구부러진 어깨도 펴보고 팔도 휘둘러본다. 뭉게구름이 몽실몽실 꽃처럼 피어난다. 물감이 떨어질 듯 파란 하늘에 구름이 수를 놓으며 자연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수십 번의 봄을 맞으면서도 해마다 이맘때는 새롭다. 어제의 삶은 잊히고 내일은 그저 막연한 희망이 있을 뿐 알 수 없다. 오늘 내가 숨 쉬는 지금은 살아있다. 아무리 좋았어도 가버린 과거는 흘러가서 새봄을 맞는 지금이야말로 온전한 내 것이다.
자작나무에 메마른 가지들이 엉켜있다. 해마다 죽은 가지를 잘라내는데 올해도 가지 몇 개를 잘라주어야 한다. 싹이 나지 않은 수많은 마른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다. 더러는 죽은 가지도 산 가지와 더불어 있어서 구별하기 힘들다. 가지를 잘라보면 죽은 가지는 뚝 부러지고 산가지는 휘어지며 부러지지 않는다. 아직은 표시가 나지 않지만 며칠 지나 싹이 나오지 않으면 알 수 있다.
작년 여름 소나무 아래에 씨가 떨어져 자란 작은 소나무를 집뒤에 옮겨 심었다. 원래는 담이 있던 자리인데 담을 허물었더니 너무 휑한 것 같아서 그곳에 심었는데 눈에 덮여서 얼어 죽은 줄 알았는데 죽지 않고 살아 있다. 아직 한 뼘 크기 밖에 안 되는 나무이지만 올 한 해 동안 잘 자랄 것 같다. 틈틈이 물 주고 기댈 목을 바쳐주면 될 것 같다. 별것 아닌 작은 나무도 겨울을 견딘 게 신기하고 대견해서 자꾸만 들여다보게 된다.
뜰에 어제 없던 꽃이 피어나고 어디선가 날아온 들꽃이 피면 참 좋다. 지난해에는 소나무 아래에 어디선가 날아온 들꽃이 피었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나무 아래에서도 최선을 다해 피어나는 보라색 들꽃이 올해도 피길 바란다. 작년 여름에 친구가 쑥 모종을 몇 개 가져다주었다. 그중 반은 죽고 반은 살았는데 올해는 잘 자라서 쑥개떡이라도 해 먹어야 할 텐데 내 마름대로 될지 모르겠다.
원하고 바라고 소망하고 희망하며 산다. 욕심인지 아니면 본능인지 모르지만 봄에만 갖는 희망사항이다. 텅 빈 텃밭에서 파란 파와 부추가 세상을 구경하겠다고 얼굴을 내민다. 팟값이 금값인데 파가 나오면 한동안은 걱정 없이 먹을 생각에 기쁘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은 텃밭을 보며 야무진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