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날씨다. 영상 29도에 체감온도는 31도란다. 오전 내내 지하실에서 있어서 그리 더운 줄 몰랐는데 막상 밖에 나와보니 엄청 덥다. 텃밭에 채소들이 축 늘어져 있다. 이제 겨우 자라고 있는 어린 채소들이 더워서 쩔쩔맨다. 씨를 뿌리고, 몇 가지 모종을 심어 놓고 열흘동안 집을 떠나 있다가 돌아왔더니 풀만 잔뜩 자라 있다. 풀을 뽑으려고 하는데 손톱만큼 나와 있는 상추가 보인다. 잘못하다가는 간신히 세상구경을 하러 나온 상추를 뽑을 것 같아 그만두고 물만 준다.
풀이 있어 땅이 덜 말라 좋은데 채소는 안 자라고 풀만 자란다. 채소도 풀처럼 쑥쑥 자라면 좋겠다. 아침저녁으로 열심히 물을 주는 남편의 정성으로 해마다 텃밭에서 나는 채소를 먹는다. 지난해는 고추농사가 안되어 몇 개 못 따먹었지만 오이농사는 잘돼서 따 먹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올해 농사는 어찌 될지 모르겠다. 이른 봄부터 모종과 씨름하며 물을 주어야 하고, 얼어 죽지 않고 날씨에 적응하게 하기 위해 애지중지해야 한다. 그렇게 정성을 들여도 죽는 것이 많아 실망을 하면서도 여전히 텃밭농사를 짓는 이유는 자라는 모습이 예쁘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밤새 자라난 채소를 보면 기분이 좋다. 물 주고 풀 뽑아 주는 수고에 비하면 별로 먹지도 못하는데 봄을 기다리며 하는 연례행사다. 가까운 지인들이 모종을 가져다주면 정성을 다해서 잘 키우고 싶은데 생각대로 잘 안될 때가 있다. 안되면 속이 상해서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한다. 그러다가 다시 봄이 오면 희망을 가지고 또 모종을 가지고 실랑이를 시작한다.
농사라는 것이 자식 키우는 것이나 똑같다.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고 정성을 다해도 잘 자라지 않거나 시들시들하면 속이 상한다. 텃밭에 조금씩 자리 잡아가는 채소들을 보며 잘 자라기를 소망해 본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뿌리지도 않은 유채가 여기저기 잘 자란다. 조금 더 자라면 뽑아서 살짝 삶아서 초고추장에 새콤달콤하게 무쳐 먹으면 맛있다. 지난해 파가 너무 비싸서 파를 사다가 먹고 뿌리를 땅에 심었는데 뿌리를 잘 내려서 파 농사는 풍년이다.
몇 년 전에 우리 집으로 시집온 부추는 어느 때보다 잘 자라 오이를 넣어 오이소박이를 담았는데 맛있게 잘 담가졌다. 지난번 손주들 봐주러 아들네 갔을 때 한병 가지고 갔더니 아들 며느리가 맛있게 먹는 걸 보니 참 좋았다. 오늘 날은 덥지만 부추꽃이 피기 전에 부추와집에 있는 오이를 넣어 오이깍두기를 맛있게 담가 본다. 오이깍두기는 만들기 쉽고 먹기도 간편하고 언제 먹어도 맛있다. 오이를 깍두기처럼 썰고 적당히 썰은 부추를 넣고 양파와 마늘과 생강을 넣고 새우젓을 넣어 버무리면 된다. 소금에 절이지 않고 간단하게 만들어 먹기 때문에 오이와 부추만 있으면 손쉽게 만들어 먹는다.
물 주며 예쁘게 잘 자란다고 칭찬하는 말을 들었는지 잘 자라주어 고맙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칭찬을 좋아하는 것 같다. 고추와 오이와 깻잎이 잘 자라서 매끼마다 상위에서 만나보고 싶은데 마음대로 될지 모르겠다. 손톱 만하게 나온 상추와 쑥갓도 덩달아 잘 자라면 좋겠다. 한 여름 재미 삼아 짓는 텃밭농사지만 욕심 같아서는 고추장아찌와 깻잎 장아찌도 만들어 먹고 싶고, 오이소박이와 오이장아찌도 담고 싶다는 야무진 꿈을 꾼다.
어느덧 여름 장미가 빨갛게 피어나고 라일락도 슬그머니 피어난다. 바라보지 않아도 때가 되면 피어나는 꽃들이 계절을 알린다. 장미꽃이 피고 지고 하는 사이에 푸르른 마가목 나무 열매가 빨갛게 익어 가면 가을이 온다. 죽은 전나무를 베어버린 땅에 심어놓은 다년생 꽃들이 하나 둘 피어난다. 한번 심어 놓으면 약속을 어기지 않고 해마다 피어 나는 꽃들이 대견하고 고맙다. 자연은 결코 나서지 않고 배신하지 않아 좋다. 오래전에 사다 심은 노란 꽃은 봄이 오면 동네가 환하게 피어난다.
샛노란 꽃이 어찌나 예쁜지 불 때마다 마음을 설레게 한다. 꽃이 예뻐 보이면 늙어간다고 하지만 꽃이 좋은 것은 어쩔 수 없다. 나무는 열매를 맺기 위해 꽃을 밀어내고, 꽃은 다음에 다시 태어나기 위해 땅에 떨어진다. 그토록 눈부시게 피던 노란 꽃은 어느새 지고 새파란 이파리만 끌어안고 있다. 민들레꽃이 노랗게 잔디를 덮더니 홀씨를 다 날려 보내고 비쩍 마른 꽃대만 쓸쓸하게 서있다. 앞뜰에 있는 작약이 빨간 꽃봉오리를 피우려 하고 해당화도 덩달아서 봉우리를 내보인다.
꽃을 피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통을 이겨내야 하는지 모르겠다. 열흘을 피기 위해 눈보라, 비바람을 견뎌내며 겨울을 살아왔다. 진한 자주색 작약꽃은 볼수록 예쁘다. 오래전 시어머니 생전에 이곳을 방문하신 적이 있다. 곱게 핀 작약꽃을 보시며 시어머니가 시집올 때 친정에서 가져온 꽃이라고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뜨거운 정렬의 여름이 익어가는 소리가 들리고 파란 하늘이 내려다보며 환하게 웃는다. 길 건너 가로등 꼭대기에 앉아 있는 까치도 덩달아 웃는다. 평화로운 6월의 하루가 간다. 오이깍두기가 익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