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이 시작되고 사랑도 여물어간다

by Chong Sook Lee



가뭄도 장마도 모두 지나간 6월의 하늘은 맑고 푸르고 한없이 싱그럽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 따라 해당화 꽃 향기가 코를 간지럽힌다. 5월이 계절의 여왕이라면 6월의 초록은 계절의 왕일 것이다. 어딜 가도 숲은 우거져 녹음이 짙어 간다. 나비들은 꽃을 찾아다니고 새들은 여유롭게 세상을 날아다닌다. 동백꽃이 시들어가고 연분홍색 6월의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체리가 빨갛게 익어간다.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뒤뜰에 앉아 바라보는 세상은 참으로 아름답다. 심심한 까치가 나무 꼭대기에 앉아서 깍깍 대며 친구들을 부르는 한가한 아침이다. 두 아들네 가족과 딸네 가족이 함께 하는 아침이다. 세상 그 무엇도 부러울 것 없다. 외손자 백일을 축하하기 위해 가족 여행을 한다. 3박 4일의 짧은 여행이지만 해마다 6월은 바쁜 달이다. 손자 생일과 둘째 아들 생일이 있고 큰 아들과 딸의 결혼기념일이 있는 달인데 이번에는 외손자 100일까지 있어서 가족 여행이 되었다. 어른들은 일 하느라 바쁘고 아이들은 학교 다니느라 바쁜데 모두 시간이 되어 모이니 너무 좋다. 여행 핑계 대고 요리를 하지 않고 외식을 하기로 했더니 돈은 많이 들지만 아주 편하고 좋다. 이런 기회가 자주 오는 것도 아니고 시간을 만들고 싶어도 시간이 안되면 쉽게 만들 수 없는 좋은 기회다. 지난 2월에 열흘동안 두 아들네 가족과 함께 하와이 여행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는데 딸네 가족이 빠져서 무척 서운했던 생각이 난다. 만삭이던 딸이 여행을 할 수 없어서 함께 못했는데 서운한 마음은 금할 수 없었다. 맛있는 것 먹을 때도, 재미있게 놀 때도 미안했는데 이번에는 짧지만 식구 모두 만나서 마냥 좋다. 남편과 둘이 손잡고 캐나다에 이민오던 날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43년이라는 세월이 가고 식구가 13명이 되었다. 이민 초기에 고생은 했지만 세월이 가서 씨를 뿌리고 열매를 맺은 것은 혼자 힘으로 된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손길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곳에서 자식들 낳아 키우며 삶의 뿌리를 내리게 허락해 주신 이에게 한없는 감사를 드린다. 더 많은 것을 원하고 더 높은 곳을 향하던 마음은 없어지고 오늘을 살게 하신 손길에 감사할 따름이다. 비가 오면 햇살이 그립고 햇살이 계속되면 비가 기다려진다. 멀리 있어 만나지 못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다 보면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들과의 사이가 뜸하게 된다. 만날 인연이 있으면 언제라도 만나게 되는 것처럼 하루하루 사노라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안개 낀 듯 앞이 보이지 않아 막연하기만 하던 세월이 가고 가야 할 길이 보인다. 욕심으로 꽉 차 있던 마음을 비우고 나니 평화가 자리한다. 세상사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꿈은 이루어진다. 어떤 날이 될지 몰라서 허둥대며 안절부절못한 세월이 가고 하늘을 보며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을 느끼는 시간이다. 뒤뜰에 있는 사과나무에 사과가 빨갛게 익어가고 배나무에 배가 익어가는 평화로운 여름이다. 온 가족이 모두 모여 같은 집에서 음식을 같이 먹고 좋은 곳을 다니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특별한 은총이다. 시댁이나 친정이나 형제가 많아 한국에 갈 때마다 식구들이 몰려다니며 웃고 즐기던 생각이 난다. 놀다 보면 캐나다로 돌아올 시간이 되고 서운한 마음에 돌아가고 싶지 않을 때도 있었다. 이제는 세월이 가고 하늘나라로 먼저 떠난 형제들이 많아진다. 세월 따라 인간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한다. 시간이 없고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도 틈틈이 만나 쌓은 추억으로 우리는 살아간다. 파란 잔디 위에서 손자들이 사촌들과 뛰어놀고 아이들은 그동안의 회포를 풀며 웃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기만 해도 좋다. 이런 모든 것들이 살아가면서 힘이 되어 줄 것이다. 돈은 언제라도 벌 수 있지만 형제들과의 우애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딸이 사는 곳이 내가 사는 곳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반 밖에 걸리지 않는 곳이니 자주자주 와야겠다. 주말에 와서 하루이틀 자고 가도 좋을 것 같다. 멀다고 안 오고, 돈 들어간다고 안 오면 기운 없고 다리힘 빠지면 못 오게 된다. 아이들이 만나서 놀고 손자들이 뛰어다니며 노는 이곳이 바로 천국일 것이다. 우리들의 여정이 시작되고 사랑도 여물어간다.


(사진: 이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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