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많은데 몸은 안 움직여진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지금은 하기 싫다. 할 일을 미루고 미루다가 언제 할지 모른다. 누가 재촉하지도 않고 꼭 지금 당장 해야 할 이유가 없어서인지 모른다. 오늘 만 날이 아니고 새털같이 많은 날 나중에 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고 귀가 닳도록 들었는데 '오늘 할 일은 내일 하자'로 바뀌었다. 괜찮다. 오늘 안 하면 내일 하고 내일 못하면 다음에 하면 된다.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이 일이다. 청소도, 정리도 다시 해야 한다. 아침을 먹고 치우고 돌아서면 점심때가 돌아온다. 점심 먹고 한숨 자고 나면 저녁준비할 시간이다. 무엇하나 제대로 해 놓지 않았는데 하루가 간다. 매일이 똑같다.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세월은 잘도 간다. 산책이라도 계속 다녀야 무언가 한 것 같은데 요즘에는 연기 때문에 그것마저도 못하고 산다. 하루종일 집안에서 뒹굴거리며 시도 때도 없이 낮잠을 자는데도 저녁에 잘 시간이 되면 여전히 졸려 잠을 잔다.
연년생으로 세 아이를 키울 때는 하루에 몇 시간밖에 자지 않고도 피곤한 줄 모르고 살았는데 지금은 조금만 졸려도 잔다. '잠은 죽어서 실컷 자면 된다'는 어른들의 말도 맞는 말인데 나이 들어도 잠이 쏟아지는 것은 막을 수 없다. 깊은 잠을 자지 않기 때문인지 몰라도 옆에서 부스럭 거리는 작은 소리에도 깬다. 쉽게 깨고 쉽게 잠드는 습성이 생겼다. 사는 것이 재미없으면 잠을 잔다고 하는 말이 있다. 사는 것이 재미있는 사람이 있겠지만 보통은 특별한 재미없이 그저 그렇게 사는 게 인생 같다.
늙을수록 더 재미있게 살아야 한다고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고작 해봐야 골프를 치거나, 산책을 가거나,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하면 하루가 간다. 큰일이나 하는 듯이 바쁘게 다니지만 별것도 아니다. 여행을 하고 문화생활을 하면 시간은 지루하지 않겠지만 그것 역시 일시적인 일에 불과하다. 젊어서 아이들에게 이것저것 가르치며 바쁘게 살다 보니 그 많은 세월이 눈 깜짝할 사이에 갔다.
지금은 그렇게 바쁘게 살라고 해도 못 살 것 같다. 생전 늙지 않을 줄 않았는데 알게 모르게 노년에 접어들어 몸이 먼저 알아서 한다. 조금 피곤하면 앉아서 쉬고 싶고, 틈틈이 자고 싶고, 편하게 살고 싶다. 힘들어도 참고 견디며 살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좋은 것만 하고 살 수는 없지만 싫은 것은 되도록 하고 싶지 않다. 남의 눈치 보는 것도 젊을 때 하는 것이지 나이 들면 그것도 힘이 든다.
좋은 사람 만나서 맛있는 음식 먹으며 좋은 이야기 하는 시간 갖기도 바쁜데 다른 것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나와 맞는 사람과 만나는 시간도 점점 짧아져 가는데 만나서 불편한 사람과 관계를 이어가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나이가 들면 마음이 넓어지고, 이해도 잘하고, 참을성도 많아지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사람들은 끼리끼리 놀러 다니고 뒤에서 남의 욕하고 편 가르기에 바쁘다. 앞에서 웃으면 뒤에서도 웃어야 하는데 친하다고 하는 사람도 앞에 없으면 흉을 본다. 욕심은 더 많아지고, 고집은 더 세지고, 계산은 더 야박해진다. 하나 주고, 여러 개 받으려고 하는 마음이 보인다. 그냥 생각 없이 살 수는 없는 건지 인심이 험악해서 절대로 손해 보려 들지 않는다.
사람 사는 것이 매일이 같은 것 같아도 매일 매 순간이 다르다. 생각이 다르고 행동이 다르고 순간순간 마음이 달라진다. 편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 살다 보면 세상이 평화롭다. 나이를 먹는 것은 인생 계급장을 더 많이 다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 평화의 정원을 가꾸는 일이다. 싸우고, 빼앗고, 이기고, 더 많이 갖는 것이 아니고 편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기쁨을 같이 하고 슬픔을 나누며, 밀어주고 끌어주며 함께 걸어가면 험한 길도 꽃길이 된다. 서로가 있어 행복한 관계를 만들고 서로가 경쟁하지 않고 서로를 돕는다면 더 나은 사회가 될 텐데 서로가 서로의 발목을 잡고 방해하는 모습이 아쉽다. 상대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더 나은 곳을 향해 걸어가면 무지개가 보인다.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을 향해 걷자.
오늘은 가지 말라 고 해도 가고, 내일은 오지 말라고 해도 온다. 조금은 손해 보는 오늘에서 평화의 단맛을 보며 손뼉 쳐주고 위로해 주고 같이 걸어가면 희망이 함께 한다. 철이 없거나 습관이 되지 않았어도 새로 시작하면 된다. 매일 새로운 하루를 맞이할 때 인간은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어제의 나는 이미 죽었고 오늘 새로운 생명으로 새로 태어나 새로운 길을 걸으면 된다.
잘못을 저지르고 후회하고 미련을 가지고 어둡게 사는 것보다 새로 받은 새 생명으로 부활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면 된다. 어제의 옷을 찢어버리고 새 옷을 입고 살아보자. 어쩌면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아름다운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