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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ng Sook Lee Apr 18. 2020

오늘은...  이상하게 그날이 생각난다

(그림:이종숙)



아직 오월이 오지 않았는데  오늘은 그날이 생각난다. 이민 온 지 24일 만에 큰 아들을 낳았을 때가 생각난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엄마가 되었을 때가 생각난다.




이곳의 5월은 겨울을 벗고 기 손톱만큼의 싹이 파랗게 돋아 나온다. 연두색으로 숲이 물들기 시작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평야에 까만 흙이 덮여 파란 하늘과 대조를 이룬다. 아무도 없는 마당을 쉬지 않고 걸어본다. 이야기할 사람도 같이 놀 사람도 없는 이곳에서의 생활을 시작한 지 3주가 넘었다. 5월 17일이 예정일이라 마음이 초조해서 안절부절못하고 하루하루 보낸다. 엄마도 안 계신데 날짜가 다가오는 것이 두렵다. 오자마자 의료보험을 신청하고 의사를 만났다. 나도 아기도 악성 철분 부족이란다. 빨리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 철분약을 주사로 투입시키기 위해 매일 의사한테 갔다.

출산 한 달을 남겨두고 이민을 가는 딸에게 아직 시간이 남았지만 첫아기이니 언제가 될지 모른다며 항상 조심하라고 한국을 떠나 오던 날 엄마는 신신당부하셨다. 그때 당시 전화를 하는 것은 하늘에 별따기이다. 비싸고 잘 들리지도  않고 할 말이 너무 많지만 안 들려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소리만 지르다 만다. 전화를 하면 더 속이 상하다. 할 말도 못 하고 서로 소리만 지르고 끝나 버리니 약만 오른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그저 목소리만 들어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어제도 걷고 오늘도 아침부터 한없이 걸었다. 왜 걸었는지 모르겠다. 그날 한밤중에 허리와 배가 너무 아팠다. 화장실을 들랑거리며 밤을 새웠다. 아직 1주일이 남았으니 아기가 나오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침에 진통이 시작했다. 남편은 일을 나가고 옆집 할머니한테 물어보니 출산할 것 같다며 병원으로 데려다주겠다고 준비를 하란다.

70세가 가까운 할머니가 나를 태우고 병원으로 향하며 할머니는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 그녀가 이곳에서 첫아이를 낳았을 때가 생각났나 보다. 생판 모르는 서양 할머니는 영어 한마디도 못하는 동양 여자를 데리고 병원에 가서 입원 수속을 밟아 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자연에 몸을 맡겼다. 간호원은 열심히 설명을  하는데 영어를 모르는 나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침대에 누워서 바깥을 쳐다본다. 병원 창문으로 보이는 잔디는 아직 누렇고 나무에는 작고 연한 새 이파리들이 자라고 있다. 가슴은 뛴다. "엄마가 옆에 있었으면 …"  좋겠다는 생각에 눈물이 난다. 서양 할머니는 "괜찮아 괜찮아 "하며 나를 위로한다. "다 괜찮으니 걱정 말아" 하지만 나는 무섭다. 진통 시간은 점점 간격이 짧아진다. 남편에게 연락할 수는 없다. 전화연락이 안 된다. 나는 혼자 아기를 낳아야 한다. 너무 무섭다. 너무 많이 아프고 허리가 빠져나가는 것 같다.


지구가 두 번 크게 돌고 아기를 낳았다. 그 지역에서는 아시안 그것도 남자아이의 첫 출생이었다. 12시간의 진통 끝에 아들이 세상에 나왔다. 나는 엄마가 되었다. 아무도 없는 캐나다 땅에서 엄마가 되었다. 저녁에 일을 끝내고 아기와 산모를 보려고 병원에 온 남편이 집에 가는 길에 근처에 있는 주유소에 들렸다. 그곳에서 장사를 하는 분이 뜻밖에도 한국분이었다. 남편이 사정 이야기를 하고 미역을 갖다 주고 미역국을 끓여 달라고 부탁을 하여 아기를 낳고 병원에 있는 일주일간 그분의 친절로 미역국을 먹을 수 있었다. 아기를 낳으니 지역신문에 크게  우리 가족을 환영해주고 첫 아시안 남자 아기의 출생을 축하해 주었다. 일주일 동안 입원하고 회복시키는 병원 지침대로 병원에 있는데 아기는 태어난 지 3일 만에 황달에 걸렸다. 작은 동네 병원이라 황달 치료는 큰 병원으로 가서 해야 한단다. 남편과 함께 아기를 데리고 큰 병원으로 가서 아기를 입원시키고 내가 있어야 하는 병원에 돌아오며 나는 차 안에서 통곡을 하며 울었다. 너무나 커단 슬픔이 덮쳐와 견딜 수가 없었다.  


아들도 낳고 남편도 옆에 있는데 엉엉 울었다. 젖은 불어서 아프고 그러면서 배는 고팠다. 울면서 맥도널드에 들려서 빅맥을 사서 먹었다. 아기를 생각하며 울면서도 너무나 맛있게 먹었다. 아기가 없는 병원에서 불은 젖을 짜내며 울었다. 아기가 보고 싶어 울었고 엄마가 보고 싶어 울었다. 햇볕이 좋아도 나무가 바람에 흔들려도 울었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곳에서의 삶이 너무 외로워서 울었다. 그렇게 3일을 보내고 큰 병원에서 아기를 데리고 오면서 나는 또 울었다. 너무 그리워서 울었고 너무 행복해서 울었다. 아무도 없는 썰렁한 집으로 들어와서 한국에 전화를 했다. 새아기에서 에미라는 호칭을 받으며 엄마로 살기 시작했다. 이웃들이 환영을 해주고 카드와 아기 선물을 주며 축하해 주었다. 병원에 데려다준 서양 할머니는 스코틀랜드계의 이민자로 오래전에 캐나다로 시집을 와서 뿌리를 내려 사는 분이다. 퇴원하여 집에 있는데 그 할머니는 따뜻하게 날 반겨 주었다.

한국에서 산모에게 미역국을 끓여주듯이 그 할머니는 정성 들여 만든 서양식 꼬리곰탕을 한 달 동안 끓여 주었다. 그 국은 소꼬리를 압력솥에 푹 고은 다음 여러 가지 채소와 보리쌀을 넣어 한참 끓인 국이다. 토마토를 넣어서 색이 곱고 진하고 서양 음식이 낯선 나였지만 정말 맛있게 먹었다. 우리는 살면서 천사 같은 사람을 만난다.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누군가를 위해 기쁘게 헌신하며 희생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제 세월이 흘러 나는 그분의 나이가 되었지만 그분이 내게 해 준 모든 것은 영원히 내 가슴에 있다. 봄이 오고 나뭇잎은 파릇파릇한 새 이파리를 달고 흔들릴 것이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생각나는 옛날 40년 전에 내가 이곳에 처음 와서 첫애를 낳았을 때가 생각나고 서양 할머니가 되어온 천사와의 만남을 기억한다. 지나간 것은 모두 아름답다.




감사합니다. 천사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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