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햇살이 눈부시다. 눈밑에 숨어있던 봄이 서서히 모습을 보인다. 너덜너덜하게 해진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을 보면 누가 봄이 아름답다 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토록 기다려온 봄은 추하기 짝이 없다. 새 옷을 입기 전의 봄은 그저 초라하고 쓸쓸한 모습이다. 아직도 가을을 몸에 걸친 채 바람이 불 때마다 헌 옷을 털어내며 화사한 봄을 꿈꾼다. 새들은 봄이 왔다고 시끄럽게 수다를 떨고 하얀 토끼는 진한 회색으로 하루가 다르게 털이 변한다. 집 앞에 서있는 소나무는 어느새 초록이 되고 엄지 손가락만 한 솔방울을 달고 서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한 자연은 바쁘게 제 할 일을 한다. 아직은 누렇고 메마른 모습이지만 어느 날 화사한 모습으로 서 있을 것이지만 눈을 벗은 뜰은 너무 지저분하다.
작년 가을에 겨울준비를 완벽하게 했음에도 잔디 위에는 여러 가지가 떨어져 아름다운 봄이 아니고 추한 봄의 모습이다. 하얀 눈으로 덮여 있을 때는 몰랐는데 눈이 녹고 안보이던 것들이 다 보여 흉하기까지 하다. 나뭇가지와 가을에 떨어지지 않은 나뭇잎이 추위에 얼어붙어 있다가 날씨가 풀리면서 눈 위로 떨어지고 눈이 녹아 잔디에 그냥 뒹굴어 다닌다. 겨울 동안 나무에 매달려 있던 열매들도 봄이 오니 힘없이 몸을 내던지고 땅에 떨어진다. 바람이 불 때마다 우수수 떨어진다. 새잎을 달기 위한 자연의 모습이다. 해마다 겨울 준비를 한다고 하지만 언제 겨울이 와서 눈으로 뜰을 덮을지 모르니 마지막 손질을 한 뒤로는 그냥 놔두고 있을 때 느닷없이 겨울이 온다. 해마다 그렇지는 않지만 어떤 해는 8월 중순부터 눈이 오기도 하는 이곳은 많은 이파리들이 단풍이 들기도 전에 얼어 버린다.
엉뚱한 겨울을 일찍 맞은 해는 다시 가을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9월 하순이나 10월에 '인디언 서머'가 있어 겨울이 오기 전에 늦여름을 한번 더 만난다. 겨울이 괜히 가을을 겁주며 잠깐 왔다 가고 잃어버린 계절을 되찾은 사람들은 다시 돌아온 가을에게 감사하며 계절을 즐긴다. 그러다가 겨울이 오면 가을이 남기고 간 나뭇잎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깨끗한 하얀 눈에 폭 빠져 버린다. 가을이 남기고 간 낡고 해진 잎은 까마득히 잊고 어서 눈이 녹고 봄이 오기를 기다린다. 기다리던 봄에는 지난가을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파란 잔디를 생각하며 봄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지만 잔디는 가을을 가득 안고 있다. 눈에 눌려 잔디가 덕지덕지 붙어있고 나뭇잎들도 그 위에 엉겨 붙어 있어 어서 빨리 청소해주기를 바란다.
바람과 함께 오는 봄은 심술궂은 겨울 때문에 오기 힘들다. 5월 마지막 주말에는 '빅토리아 데이'라고 하는 공휴일이 지나야 안심하고 모종을 심는다. 해마다 5월 초에 날씨가 좋으면 사람들은 근질근질하여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모종을 심는데 얼어 죽는 경우가 많다. 봄이 일찍 온 재작년 5월은 너무나도 날씨가 좋았다. 사람들은 5월 말의 날씨를 잊고 싶어 했고 무시하고 싶어 했다. "설마뭐 이런 날씨에 눈이 올리가 없어" 하며 모종을 했다. 너무나 잘 자랐다. 그날도 온도가 높았는데 밤에 서리가 내렸다. 지나가던 찬 공기가 잠깐 이곳을 방문했는지 아침에 물을 주려고 나가보니 채소가 새까맣게 얼어 죽었다. 얼어버린 이파리를 만지고 또 만져도 살아나지 않았다. 너무나 속이 상했지만 다 키운 채소를 갖다 버릴 수밖에 없었다.
사과나무가 봄을 맞는다.(사진:이종숙)
그렇듯 이곳에 봄은 겨울과 봄을 왔다 갔다 하면서 온다. 오지 않을 듯 왔다가 건너뛰듯 다녀간다. 겨울이 다가오는 가을부터 기다리는 봄은 기다림에 지쳐 체념할 때 잠깐 왔다가 여름에게 자리를 내주고 떠나간다. 이곳의 봄은 그저 이름뿐인 봄인 셈이다. 가을이 어지럽히고 간 뜨락은 아직도 군데군데 눈이 쌓여있다. 이번 주에 날씨가 좋다는 기상 예보로 청소 준비를 한다. 엊그제 남편은 사과나무 두 그루와 체리나무 전지를 해주었다. 작년에도 필요 없는 가지가 많이 자라서 전지를 하고 난 남편이 손아귀가 아프다고 엄살이다. 잔가지가 땅에 수북이 쌓여있다. 그것을 집어 정리하는 것도 큰일이다. 잘라놓은 잔가지를 모두 묶어서 쓰레기 차가 오는 날 밖에 내어놓아야 한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사람 손으로 해야 할 일은 여전히 많다.
겨울 동안 기다려온 봄인데 그까짓 일은 사실 일도 아니다. 눈이 와서 허리까지 쌓이면 꼼짝 못 하고 집 안에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할 일이 많아도 햇볕을 쐬며 땀 흘리며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조금씩 눈이 녹고 얼은 땅이 녹으면 땅을 뒤집고 새 흙을 부어주고 씨앗을 뿌리고 모종을 심는다. 이대로 가다 보면 어쩌면 5월 말이 되면 날씨가 좋아 특별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날씨의 마음을 알 수가 없다. 한여름에도 굵은 우박이 내리는 이곳이라 한시도 마음을 놓기 어렵다. 작년에도 멀쩡한 여름에 자두만 한 우박이 와서 밭에서 우박 세례를 맞는 상추가 날벼락을 맞았다. 날씨가 풀리고 마른땅이 보인다. 달래 밭은 벌써 파릇파릇하게 달래가 하나둘 나오기 시작한다. 지금은 볼품없이 초라해 보이지만 눈여겨보지 않는 사이에 부쩍 자랄 것이다.
보리싹처럼 한 뼘 정도 자랐을 때 고추장 넣고 새콤달콤하게 무쳐서 먹고 달래 듬뿍 넣고 양념간장 맛있게 만들어 하얀 쌀밥에 비벼먹으면 잃었던 입맛이 돌아온다. 자그마한 텃밭에 상추와 갓을 심고 앵두나무 옆 양지바른 남쪽 땅에 깻잎을 심고, 커다란 화분에 고추 모종 몇 개씩 심어주면 우리 두식구 먹고 가까운 이웃하고 나눠먹을 만큼 된다. 날씨가 따뜻해서 마당에 나오니 온통 더러운 곳 투성이다. 나뭇잎이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질퍽거리고 어디선가 들어온 쓰레기가 어서 치워주기를 기다린다. 까치들은 쓰레기가 혹시 음식이 아닌가 하며 발로 헤치다 날아간다. 하얀 눈으로 가려졌던 겨울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파헤쳐진다. 잔디에 물이 마르면 잔디를 긁어서 깎아주면 제대로의 모습이 보인다.
아직은 보이지 않는 봄이라서 봄이 왔다고 할 수는 없지만 화단에 튤립이 하나 둘 피고 이름 모를 노란색 꽃이 피고 빨간 장미가 피는 6월이면 제대로 된 봄을 맞는다. 겨울과 봄이 숨바꼭질하며 여름을 맞이하는 이곳은 8월 하순부터 서서히 겨울을 준비한다. 그토록 기다리는 봄은 여름을 안고 가을을 맞으며 또 다른 봄을 향한 그리움을 놓고 떠난다. 지나고 보면 잠깐인 인생처럼 아쉬움 속에 자리를 내준다. 돌고도는 계절의 순환으로 없던 것이 생겨나고 있던 것이 없어진다. 그리움은 망각 속에 스러지고 사랑은 봄처럼 다시 피어난다. 지금은 비록 초라한 봄이지만 그래도 봄은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