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행복

by Chong Sook Lee

봄을 그토록 기다렸는데 어느새 여름도 가고 가을이 왔다. 어린 나뭇잎들은 벌써 길 위에 피곤한 몸을 던진다. 빨갛고 노랗게 물든 모습은 보기 좋지만 왠지 서글퍼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지만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면 허송세월 보낸 것 같아 후회가 되지만 내가 다시 산다 해도 비슷할 것이라며 자위해 본다.

이제 계절도 바뀌었으니 춘 하복은 집어넣고 추 동복을 준비하다가 며칠 전부터 하루 몇 가지씩 살림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몇십 년 된 살림이니 엄청나다. 살아가면서 틈틈이 버리고 정리도 하였지만 지금부터는 좀 더 과감 해 져야겠다. 매일 쓰는 것만 쓰고 입는 것만 입으니 옷도 물건도 그리 많은 것이 필요 없다.

정신이 없어 금방 봤는데도 어디에 놓았는지 잊어버리니 이제는 무엇이든지 보이는 곳에 놓아두어야겠다. 그렇게 하려면 개수가 많은 것들은 없애야 하고 안 쓰는 것들은 치워야 할 텐데 몇십 년을 모아둔 것들이라 감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하나하나 다 이유가 있고 추억이 있는 물건 들이니 알 수 없는 미련 때문에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미루어 왔는데 이제 내게 남은 시간이 길지 않다. 지난 세월이 말없이 가 버렸듯이 오는 세월 역시 조용히 왔다 갈 것이다. 세월이 빨리 가기를 기다렸을 때 세월은 느리게 갔던 것 같은데 지금은 세월이 너무 빨라서 붙잡아 놓고 싶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미니멀 라이프"를 받아들여 간소한 생활을 하는 세상에 쓰지 않는 여러 가지를 가지고 산다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다. 일단 오늘은 오래된 앨범부터 정리하기로 했다. 몇십 년 전 앨범이라 사진도 몇 장 들어가지 않는데 투박하고 무겁다. 흑백 사진이 다 붙어 버려서 뜯어 내는데도 힘든다. 학창 시절에 찍었던 사진 속의 친구들의 얼굴은 물론 이름 조차 잊힌 세월이 흘렀다. 한때는 내 인생의 전부였던 그들도 세월 따라 가버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사는지 조차 모른다. 소중한 보물인양 버리지 못하고 지금껏 가지고 있었는데 다 떼어보니 한 줌밖에 안된다. 이토록 간단하게 정리를 하면 될 것을 그 무겁고 너덜너덜한 앨범을 이사 때마다 가지고 다닌 것이 후회스럽다.


아무리 백세시대를 살아가는 세상이지만 주위 사람들을 보면 늙어감은 감출 수 없음을 느낀다. 몇 살 위인 사람들도 여행이고 뭐고 다 귀찮고 집이 제일 좋단다. 아이들이 오는 것도, 아이들 집에 가는 것도 몸이 따라 주질 않으니 힘에 부친다고 한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더 열심히 살아야 할 텐데 몸은 앉거나 눕기를 원한다. 밥 먹고 조금 앉아 있다 보면 잠이 온다. 그러면 슬그머니 누워서 스마트폰을 가지고 놀다가 그것도 귀찮아 이내 잠이 들곤 한다. 남의 일인 줄 알았던 그 늙어가는 모습이 나의 모습이 되어가고 있다.

특별히 할 일도 없고 갈 곳도 없으니 그럭저럭 세월 따라 하루하루 살아간다. 이렇게 세월을 보내다 보면 어느 날 늙어버려 청소도, 정리도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한 번에 조금씩 하겠다고 결심한 뒤부터 나름대로 매일매일의 생활이 활력이 생긴 것 같다. 하루하루의 계획한 일을 끝내고 내일을 계획한다. 아침 먹고 운동하고 바로 그날 할 일을 하고 나면 조금씩 정리된 모습에 한결 기분이 좋다. "그 날" 이 오면 사용하려던 물건들이 자리만 차지하고 쓰지 않은지 너무나 오랜 세월이 지났다. 지금 까지 오지 않던 특별한 "그 날" 은 바로 오늘이다. 우리네 삶에는 결코 "그 날" 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껏 쓰지 않던 물건들은 앞으로도 쓰지 않을 것이다. 지나간 세월 동안 기다려 왔던 그 날은 수 없이 다녀 간 것을 모르는 채 여전히 기다리며 살아간다.


이제는 만능 백과사전인 스마트폰 하나면 있으면 다 물어보고 무엇이든지 다 배울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릇도 요리책도 아무 소용이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사진도 손가락보다 더 작은 유에스비에 저장해서 보관하며 보고 싶을 때 보면 된다. 하나라도 더 장만하여 살림을 늘리면 부자인 줄 알았던 시대는 가고 필요한 것만 가지고 단순하고 간편하게 사는 사람이 부자인 세상이 되었다. 쓰던 물건에 애착을 버리고 깨끗이 정리된 공간 속에 행복을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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