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속에서의 하루

by Chong Sook Lee


12월 21일 일출 (사진: 이종숙)






가을은 계곡과 산책길을 온통 낙엽으로 덮고 떠났다. 눈은 아직 없지만 계곡은 이미 겨울의 모습을 하고 있다. "트윌리 글 팍" 주차장에서 "앤토니 헨데 다리"까지 3.2 km 가 된다 하니 왕복 2시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넓게 펼쳐져 있는 이 공원은 거대한 절벽과 긴 강을 끼고 있어 한번 와 본 사람은 계속 오고 싶을 정도로 매력이 있다. 개 산책 공원으로 유명하고, 산책로와 자전거 트레일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계절에 관계없이 즐겨 찾는다. 날씨가 별로 춥지 않아서 앞으로, 뒤로 많은 사람들이 산책을 한다. 혼자 개를 데리고 걷는 사람이 " 이리가 돌아다니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충고를 한다. 깊은 숲 속이니 야생동물이 있겠지만 막상 이리가 돌아다닌다는 말을 들으니 슬쩍 겁이 났다. 그래도 산책길이 넓고 오가는 사람들이 있어 별 일은 없으리라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랐다.

숲이 울창하고 활엽수가 많아 여름에는 시원하고 잎이 다 떨어진 이 무렵에는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하늘이 얼굴을 내민다. 뽀얀 백양나무들이 키 재기 라도 하는 듯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있다. 산봉우리가 없어서 산이라 말을 할 수는 없지만 계곡이 깊고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쳐 있고 그 아래로 강물이 흘러 높은 지대에서 보면 정글의 모습처럼 정말 광활하여 웅장하기까지 하다. 금방이라도 인디언들이 말을 타고 활을 쏘며 나타날 것 같은 그야말로 영화에서 볼 수 있는 한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딱 1 시간 만에 목적지에 도착하여 돌아갈까 하는데 앞을 보니 조금 떨어진 다리 밑에 좁은 오솔길이 눈에 띄었다. 강기슭으로 걸어가는 길로 갈 수 있을 것 같아 온 길을 다시 되돌아 가는 것보다 강가로 걸어서 돌아가기로 했다. 산 짐승들이 걸어 다니는 좁은 오솔길 왼쪽에는 넓은 들판이 있다. 길 따라 철망이 쳐져 있고 철망 밖으로는 "출입금지" 푯말을 붙여 놓은 것이 보인다. 오솔길에는 누런 풀들이 무릎 높이 이상으로 크게 자라 바람에 흔들리고 아무도 걷는 사람이 없다. 안내판을 읽어 보니 숲이 깊은 이곳은 여러 가지 야생동물이 많은 곳이란다. 이리, 토끼 그리고, 살쾡이와 땅속에 사는 두더지들이 다. 그중 하나인 두더지가 땅속으로 들락 거리며 파 놓은 흙더미들이 군데군데 맨 흙을 드러내고 있고 여기저기 그들의 배변이 보인다. 이리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혹시나 하고 나뭇가지를 주워 손에 들고 걸어갔다. 하늘은 높고 바람은 잔잔해서 어릴 적 시골에서 산길을 걸었던 추억에 젖어본다.

조금 떨어진 곳에 "앱코"라는 유틸리티 회사의 빌딩이 보일 즈음 누런 풀과 똑같은 색깔의 이리 한 마리가 내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소리도 없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는지 모를 일이다. 안 그래도 아무도 걷지 않는 오솔길에 이리가 나타날까 봐 은근히 겁을 먹고 걸어갔는데 나타난 이리를 보고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깜짝 놀란 나는 남편 뒤로 숨고 남편은 소리를 크게 질러 이리를 쫓아 보냈다. 막상 말로만 듣던 이리를 보고 나니 심장이 두근두근 한다. 우리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지만 순식간에 담 너머로 사라진 풀숲에 서 있던 누런 이리의 모습은 한동안 내 눈 안에 맴돌았다.

철망 밖으로 도망친 이리가 다른 이리들과 한동안 울어대는 소리가 기분 나쁘게 허공으로 흩어질 때 마침 개 두 마리를 데리고 쇠칼을 손에 들고 걸어오는 사람을 만났다. 서로 인사를 하며 조금 전에 이리를 만났다 하니 올해는 유난히 이리를 많이 보았단다. 개를 데리고 숲 속으로 걷는 그는 얼마 전 같이 다니던 개 한 마리와 이리가 쫓고 쫓기며 이리가 개 넓적다리를 물은 사고 이후로 칼과 톱으로 된 쇠칼을 호신용으로 가지고 다닌다 한다.

강 쪽으로 난 길을 찾기 위해 숲 속으로 들어갔지만 길이 없어 도저히 걸을 수 없었다. 철조망을 따라 계속 가다 보니 양쪽에 길이 있다. 한쪽은 절벽으로 올라가는 길이고 다른 한쪽은 내리막 길로 강 쪽으로 가는 길이었다. 어차피 강변을 따라 걸을 계획이라서 내리막 길로 가기로 했다. 어렵지 않게 강가에 이르렀다. 홍수 때를 위해 자갈을 많이 쌓아 놓은 곳도 있고, 풍랑에 실려 온 나뭇가지들이 강기슭에 어지럽게 널려 있다. 강물은 천천히 흐른다. 다녀간 사람들의 발자국을 따라가 보니 몇 그루의 커다란 나무들이 가는 길에 길게 누워있다. 도저히 넘어갈 수가 없었지만 얼키설키 엉키고 튀어나온 나뭇가지 들을 발로 밟고 가지를 꺾어가며 간신히 넘었다.

강변에 물이 넘쳤던 흔적은 있지만 걸어가기에는 수월하여 계속 걸어가다 보니 길이 끊겨 더 이상 앞으로 갈 수가 없다. 지금부터는 오던 길을 돌아가던지 아니면 가파른 절벽을 기어오르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돌아가자니 이리떼와 마주칠 것 같아 무서운 생각이 들어 도저히 돌아가고 싶지 않다. 절벽을 올려다보니 무척 가파른 데다 나무들이 빽빽이 있어 발 디딜 틈도 없어 보이지만 위로 올라가다 보면 아까 멀리 보였던 주택가로 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오르기 시작했다.

가시덤불과 나뭇가지를 헤치고 한참을 오르니 절벽 꼭대기에 집들이 보인다. 야생동물의 침입을 막기 위해 넓은 뒤 뜰에 철망으로 막아 집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철망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 보니 맨 끝에 있는 집에 철망이 없어 들어갔다. 그야말로 엄청 큰 집이다. 마루가 보이고 집안에 불이 켜져 있다. 한마디로 담이 없는 집에 주거 침입을 한 것이다. 우리는 일단 몸을 낮추어 양손을 높이 들고 집안에 신호를 보냈다. 혹시라도 사람이 안에서 우리를 보고 있다가 침입자로 오인하여 총이라도 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아무런 인기척이 없어 옆문을 통해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주택가로 들어설 수 있었다. 절벽을 오르느라 얼굴에는 땀이 비 오듯 하고 옷에는 온통 나뭇잎과 마른풀들이 들러붙어 있어 털어 내며 지도를 보니 2시간을 걸어야 우리가 차를 세워놓은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단다. 절벽에서 잘못하여 다치거나 밑으로 굴러 떨어질까 봐 노심초사하여서 온몸 전신이 무척 피곤하다.

서서히 동네 길을 걸어가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길을 물으니 아주 멀다며 근심 어린 표정을 하며 지나쳐 간다. 그래도 더 확실하게 물어보기 위해 개를 데리고 산책 나온 남자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그는 친절하게도 30-40분 정도 걷는 시간을 줄일 수 있게 그쪽으로 가는 계곡 입구까지 차로 데려다주겠다 한다. 차로는 불과 5분 - 10분 정도의 길이지만 녹초가 되어 있는 우리에게는 더 말할 수 없는 휴식의 시간이었다. 생전 가 보지 않은 동네에서 알지 못하는 사람의 도움으로 우리는 산책길 입구에 있는 다리까지 편하게 도착했다. 긴장이 풀리니 배고픔이 밀려온다. 배낭에 있던 간식을 먹으며 물로 목을 축이고 나니 앞으로 남은 산책길이 가벼워졌다. 생각지 않은 곳으로 가서 갖은 고생하고 모르는 것을 알게 되고, 모르는 사람의 친절로 이어진 오늘의 산행은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의 멋진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계획했던 2시간의 산책은 4시간 45분의 긴 산행이 되었다. 자려고 자리에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는다. 눈을 감으니 오늘 걸어 다닌 산과 강과 계곡이 눈에 보이는 듯 선하게 그려진다. 누런 풀숲에서 마주친 이리의 모습이 선명하다. 마른풀과 죽은 나무가 손을 대기가 무섭게 꺾어지고 뽑아지던 절벽의 위험했던 산행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길이 막혀 더 이상 갈 수 없었을 때 돌아갔어야 했는데 혹시라도 들판을 돌아다니는 이리떼를 만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운 생각에 낯선 숲 속에서 헤매던 무모하고 정신없던 하루였다. 모르는 우리에게 선행을 베풀어 준 그 사람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보이지 않는 이의 특별한 보살핌에 감사한다. 우연히 마주친 이리 와 우연히 만난 수호천사의 도움이 가슴을 뛰게 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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