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가다 보면 봄을 만난다

by Chong Sook Lee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가을이 아직 가지 않은 줄 알았는데 온도가 많이 내려갔다. 겨울이 온다고 신호를 보내고 가을이 떠나는 것 같다. 해는 구름 뒤에서 늦잠을 즐기는지 보이지 않는다. 바람은 잔잔하고 떨어지고 싶지 않은 단풍 몇 개가 나뭇가지에서 흔들거린다. 특별한 일도 없고 할 일도 없지만 무언가 할 일을 찾아봐야 한다. 나의 시간은 짧아져 가는데 게으름은 늘어난다.


오래전, 사업을 할 때 일 년에 한 번 장부를 회계사에게 가져다주면 총산을 하여 세금을 내야 한다. 그러려면 매일매일 수입과 지출을 적어 놓아야 하는데 할 일을 미루고 한 달 두 달 미루다 보면 일 년이 거의 다 되어 서류를 가져다주어야 하는 시간이 임박해지면 마음이 급해 서두른다. 매일 조금씩 했으면 좋으련만 매일매일 미루다 큰코다치는 경우다.


일 년 치를 한꺼번에 하려면 힘들어서 쩔쩔매면서도 버릇을 고치지 못한다. 물론 수입과 지출에 관계되는 자료는 꼬박 모아 놓아서 장부에 적기만 하면 되지만 그것도 쉽지 않다. 장부에는 수입에서 지출을 뺀 액수가 딱 떨어져 나와야 하는데 계산이 맞지 않는 경우는 어디서 잘못된 것인지 찾아야 한다. 하루종일 일을 하고 저녁을 먹고 나면 피곤해서 잠이 쏟아지는데 문제를 찾는 것이 힘들다.


눈을 크게 뜨고 봐도 답이 보이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한숨 자고 일어나서 한다. 할 때마다 다음에는 매일매일 해야지 하지만 분기가 끝나면 마음이 해이해져서 미루게 된다. 일 년 치를 하면서 이렇게 하루하루 조금씩 하다 보면 언젠가 끝나겠지 하는 다짐을 하면서 한다. 머릿속으로는 결심을 해도 매번 안 하고 미룬다. 결국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을 보내고 체념을 한다. "아이.. 어차피 밀렸으니 나중에 하지."
나 나름대로 핑계를 대며 미루었던 생각이 난다.


삶은 습관이다. 좋아도 싫어도 해야 할 것은 미루지 말고 바로바로 해야 하는데 하지 않으면 결국 내 발등에 불똥이 떨어진다. 지금도 일할 것은 많은데 요리조리 피하며 하지 않는다. 누가 해줄 것도 아니고 내가 해야 하는 일인데 누구를 믿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내가 하지 않으면 아이들이 해야 하는데 그것도 어려운 일이다. 집안을 둘러보면 필요한 물건보다 필요 없는 물건이 더 많다. 그렇다고 다 치우고 아무것도 없는 빈집에서 살 수 없다 보니 그냥 놔둔다. 결국 어느 날 누군가의 손에 의해 버려질 물건들이다.


사람에게 수명이 있듯이 아무리 소중하고 귀중한 물건도 물건마다 수명이 있다. 사람끼리 만날 때가 있으면 이별할 때가 있는 것처럼 물건도 보내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봄인가 했는데 겨울이 다가온다. 누구나 자신의 수명을 모르기에 오는 시간은 알아도 가는 시간은 모른다고 한다. 건강할 때는 천년만년 살 것 같아도 나이가 들면 생각이 변한다. 영원히 푸르름이 계속될 것 같았는데 나뭇잎이 다 떨어진 것을 보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음을 실감한다.


고통 없이 행복은 오지 않는다. 겨울이 없는 봄은 존재하지 않는다. 봄은 겨울이 있기에 더 아름다운 것이고 가을은 잠시 머물고 떠나기에 더 아쉬운 것이다.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따스한 봄을 기다리고 좋은 날을 기다리며 오늘을 산다. 오지 않는 날을 기다리고 보이지 않는 날을 기다린다. 흐린 날에는 맑은 날을 기다리고, 비가 오면 맑은 햇살을 그리워한다.


나날이 짧아져가는 해가 하루종일 얼굴을 보여 주지 않는다. 일기예보에 오늘 밤에는 영하 6도가 된다고 한다. 겨울은 이미 문턱을 넘어와 있다. 이제는 가을과 이별을 하고 겨울을 껴안아야 한다. 싫다고 밀쳐낼 수도 돌려보낼 수도 없으니 같이 놀아야 한다. 눈 오고 추우면 집에서 놀고 견딜만하면 나가면 된다. 천천히 살자. 눈을 밖으로 돌리던 것을 집안으로 돌리면 된다. 집안에도 놀 거리가 많다. 그림도 그리고 서류도 정리하며 새로운 재미를 찾아보자.


멋진 옷을 미련 없이 털어버리고 지상의 삶을 끝내고 지하의 삶에 충실하는 나무를 보자. 새봄에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기 위한 특별한 겨울이다. 춥고 어두운 시간이 지나면 화사한 날이 온다. 어제는 오늘을 위해 사라져 가고 오늘은 내일을 위해 존재한다. 오늘의 희생으로 내일을 선물 받는다. 씨를 뿌리고 싹이 나오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싹이 나오면 비바람에 시달리며 온갖 시련을 견뎌야 한다.


잠자고 나가 놀다가 들어와서 밥 먹고 자는 집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조금씩 보인다. 필요해서 산 것들이 필요 없어져 간다. 세월 따라 나이 들어가는 사람처럼 집도 많이 낡았다. 여기저기 페인트 벗겨진 곳도 보이고 먼지도 쌓여 있으니 손을 대야 하는데 선뜻 용기가 나지 않는다. 무엇이든 시작하기는 쉽지만 끝내기는 어렵다. 섣불리 무언가를 시작하면 후회하기 십상이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안 좋다고 한다. 괜히 서두를 것 없이 지금껏처럼 놀고 심심하면 한두 가지 하면 된다. 무슨 일이든 한꺼번에 다 하려고 하면 시작하기도 전에 질린다. 어차피 인생은 미완성이다. 오늘 못하면 내일 하고 내가 못하면 누군가가 하면 된다. 하루에 한 가지씩만 해도 일 년이면 365가지를 할 수 있다. 욕심내지 말고 정도껏, 능력껏 하면 재미도 있고 힘도 안 든다.


빨리 가는 사람도 늦게 가는 사람도 종착역에서 만나는 게 인생이다. 급하게 먹는 밥은 체하는 법이다. 꼭꼭 씹어 천천히 먹으면 살이 되고 피가 된다. 인생도 천천히 가다 보면 언젠가는 목표에 다달을 것이다. 겨울이 오면 봄도 온다.


(사진: 이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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