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온다. 올 겨울의 첫눈이다. 언제부터 내리는 눈인지 세상이 모두 하얀 옷을 입었다. 삶과 죽음은 한끝차이고 가을과 겨울은 하룻밤 사이다. 어제 하루종일 찡그리고 있던 하늘이 드디어 세상에 눈을 뿌린다. 어제의 망설임은 이제 없어지고 눈은 신나게 춤을 추며 세상을 덮는다. 나무 위에도, 지붕 위에도, 시들어 누워있는 풀 위에도 살며시 내려앉는다. 어제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새 옷을 입었다. 눈은 먼저 내리려고 애쓰지 않고, 빨리 가려고 서두르지 않고 정답게 내린다. 땅에서 만나 긴 겨울을 함께 해야 하기에 그럴 것 없다. 뒹굴어 다니던 피곤한 낙엽을 살며시 덮어주고 몇 개 남은 단풍을 어루만져 준다. 계절은 이렇게 또 바뀌고 있다. 어제의 모습은 눈 속에 묻어버리고 새로 태어났다. 땅을 덮고, 도로를 덮고, 들판을 덮어준다. 사람들의 발길이 급해진다. 겨울이 올 줄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하며 투덜댄다. 차들이 거북이처럼 움직이고 여기저기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첫눈이 오는 날엔 조심한다고 해도 이런저런 일이 많이 생긴다. 천천히 가도 빨리 가도 미끄러운 도로는 인정사정없다. 특별히 할 일 없으면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눈 오는 풍경을 바라보는 게 최고다. 다음 주에는 핼러윈인데 해마다 눈은 그날을 잊지 않고 온다. 아이들의 발길이 바빠지고 엄마 아빠의 근심이 커진다. 날이 좋으면 아이들이 더 잘 놀을 텐데 눈이 방해를 한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하루 저녁에 150여 개의 캔디나 초콜릿을 준비해도 모자랐는데 지금은 많아야 50개 정도 준비하는데 그것도 남는다. 동네 아이들이 다 커서 나간 동네에 아이들 구경하기가 어렵다. 아이 우는 소리도 들은 지 오래고 아이와 함께 걷는 사람도 못 본다. 이민 오는 사람들은 많아서 인구수는 늘었는데 아이들 수는 줄어든다. 지난여름에 산불이 났을 때 뉴스를 보는데 대피령으로 사람들을 옮겨야 하는데 노인들이 다반사였다.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휠체어에 태워 움직이는 일이 보통이 아니었다. 아이는 없고 노인이 많아지는 세상이다. 세상이 바뀌고 있다. 인공지능이 많아지고 사람의 일은 없어지고 사람수는 적어지고 인간이 할 일은 없다. 이대로 가다가는 어느 날 인공지능 만 왔다 갔다 하는 세상이 될 것 같다. 얼굴 보고 정을 나누는 시대가 아니고 손가락으로 기계와 대화하는 세상이 되는 것 같다. 푸르던 잔디는 하얀 카펫이 되었다. 아직은 10월이 가지 않았으니 눈이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바로 녹겠지만 겨울이 실감 난다. 오래전 겨울에 눈이 오지 않았던 해가 있었다. 잔디는 누렇게 되고 나무들은 잎을 다 떨구고 발가벗고 서있는데 사람들은 이게 웬 떡이냐 하며 좋아하였다. 평소 같으면 무릎 위에까지 눈이 쌓여 있어야 하는 때에 눈이 없으니 겨울에도 사람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다닐 정도였다. 크리스마스날 큰아들이 사는 캘거리에 가는데 산타클로스 옷을 입은 남자가 오토바이를 몰고 도로를 가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휘파람을 불던 것이 생각이 난다. 눈이 와야 할 때 안 와서 좋았는데 겨울은 그냥 가지 않는다. 그 뒤로 엄청난 폭설이 내렸던 기억이 난다. 지붕 위에 내려앉은 눈이 바람에 날려 땅에 떨어진다. 며칠 전에 숲 속을 걸어가 보니 나뭇잎이 고루고루 숲을 덮고 있었다.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을 바람이 날라다 공평하게 나눠 준 것이다. 지금 오는 눈도 공평하게 나누어주는 모습이 보인다. 나뭇가지에 눈이 쌓여있다. 오고 가는 새들이 앉아서 쉬다 간다. 이제 벌거벗은 나무들은 눈이 덮어준다. 차분하게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런저런 추억이 떠오른다. 눈으로 얼음집을 만들고 길 건너 학교 운동장에 있는 눈 쌓인 언덕에서 눈미끄럼을 타던 아이들은 어른이 되었다. 세월 따라 추억이 쌓이고 또 다른 추억을 만들며 산다. 어제는 가을, 오늘은 겨울이 되었다. 가버린 겨울을 좀 더 즐길걸 후회하지 말고 겨울을 즐기자. 겨울은 춥고 어둡지만 보이지 않는 희망을 품고 있다. 쌓이는 눈밑에서 자연은 봄을 준비한다. 보다 아름다운 봄을 만들기 위해 겨울을 포옹해야 한다. 추우면 옷을 더 껴입고 눈이 많이 오면 땅 위에 있는 더러운 것을 덮어주어 고맙다고 생각하면 된다. 호황 찬란하던 단풍잎이 다 떨어지고 나뭇가지에는 하얀 눈꽃이 피었다. 눈은 하염없이 내려 쌓인다. 이제는 누가 뭐래도 겨울이다. 사과나무 잎은 떨어지지 않고 버티더니 그대로 겨울을 나려나 보다. 사과나무 이파리 위에 쌓인 눈이 포근해 보인다. 성질 급해도, 게을러도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겨울은 맞는다. 사람이나 나무나 살아가는 모습이 다르다. 떠나기 바빠 인사도 못하게 급히 가는 사람이 있듯이 가을이 가기도 전에 옷을 벗어 버리는 나무도 있다. 낡은 잎을 달고 봄을 맞는 나무도 있고, 잎을 다 떨어뜨리고 겨울을 견디는 나무도 있다. 연분홍 색 사과꽃 대신 사과나무에는 화사한 눈꽃이 피었다. 이대로 눈이 계속 내리면 10센티는 족히 쌓일 것 같다. 온도는 영하 7도라고 하는데 체감온도는 영하 13도라고 하니 오늘 하루는 조용히 집이나 지키고 있어야겠다. 심심한 김에 뜰에 나가서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쌓인 잔디 위에 발자국을 새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