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ong Sook Lee May 28. 2024

5월은 가는데... 봄이 온다


봄이란 기다리다 지칠 때 잠시 들렸다 모른 체하고 가버리는 계절이다. 겨울 동안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 마음을 전혀 모르는 것 같다. 올 듯 말 듯하다가 여름에게 자리를 내주고 가버린다. 원래 봄이라는 계절이 있나 할 정도로 잠깐 왔다 간다. 어쩌면 봄은 우리의 희망사항인지도 모른다.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아도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에 절망하고 희망하고, 괴로워도 희망하며 산다. 어느새 5월이 간다. 제대로 된 봄을 느끼기도 전에 여름이 온다.


3월 어느 날 친구가 모종을 가져온 뒤로 물을 주고 이리저리 옮기며 햇볕을 쬐어 주었는데 정성이 모자랐는지 밭에 심기도 전에 모두 다 죽어버렸다. 너무 일찍 싹을 낸 것 같다. 작은 화분에 영양이 없어지니 살 기력이 없어 죽은 것이다. 어제 다시 모종을 얻다 놓았는데 오늘 날씨가 좋아서 텃밭에 심으려고 한다. 가느다랗고 연한 모종들이 변덕스러운 날씨에 견디고 살아남아야 하는데 걱정이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봄이 오기 전부터 씨를 불려 작은 화분에 심고 싹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좁쌀만 한 싹이 나오면 매일매일 들여다보고 정성을 다하여 나누어주는 모종인데 모종을 나누어준 친구에게 미안하게 죽어버렸다. 죽이고 싶어서 죽인 게 아니니 어쩔 수 없고 이번에 얻은 것은 잘 키워야 한다. 겨울이 길어 채소가 비싼 이곳에서 여름 내내 먹을 양식이다. 지난해 떨어진 파씨가 올해는 풍년이다. 봄이 오기 전부터 추위를 무릅쓰고 땅을 뚫고 나오는 파가 너무 고맙다. 안 그래도 천정부지로 올라가는 파 값이 파를 사기 전에 살까 말까 망설였는데 이제는 파가 많아  파무침도 해 먹고 여기저기 넣어 먹는다.


어제 하루종일 비가 많이 와서 텃밭에 안 보이던 싹들이 많이 보인다. 먹을 수 있는 것인지 잘 모르지만 일단은 뽑지 말고 놔둬야 한다.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은 유채인지 갓인지 모를 이파리가 여기저기 군데군데 옹기종기 앉아 있다. 갓 이면 어떻고 유채면 어떤가 그저 뽑아서 씻어서 삶아 무치든지 국을 끓이든지 해서 먹으면 된다. 봄에 나오는 싹들은 연해서 뭐를 해 먹어도 좋다. 그 옛날 엄마가 해주시던 음식은 무엇이든지 맛있던 생각이 난다. 특별한 양념을 넣지 않아도 요술쟁이 같은 엄마 손이 지나가면 맛있었는데 그때의 엄마 나이보다 훨씬 많은 나이에 엄마의 손맛을 그리워하며 흉내 내고 산다.


마흔 살이 넘은 아이들이 집에 오면 엄마가 한 음식이 맛있다고 잘 먹는 것을 보면 돌아가신 엄마도 우리가 잘 먹는 모습에 행복하셨을 것이다. 세상의 엄마가 없다면 어떤 세상이 될까 의문이다. 기억 속의 엄마는 뭐든지 잘하셨다. 그 시절에 신교육을 받으셨던 엄마는 과자나 빵을 만드시고 손재주가 좋으셔서 옷과  뜨개질을 잘하셔서 우리들 옷을 만들어 주셨다. 6남매를 기르시기에도 벅차셨을 텐데 잠시도 가만히 계시지 않고 틈틈이 무언가를 만들며 시간을 보내셨다. 그런 엄마를 닮아서인지 나도 가만히 있는 시간이 아까워서 시간이 없어도 빵을 만들고 천이 보이면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을 보면 유전자는 거짓말을 안 하는 것 같다. 나는 친정마를 닮고 아이들은 나를 닮아 유전자를 이어간다.


오늘은 그야말로 완벽한 봄이다. 며칠 동안 오던 비도 그쳤고 하늘은 맑고 푸르러 남편은 아침 일찍부터 모종을 심기 위해 텃밭을 정리한다. 지금  심으면 6월 한 달 키워서 먹기 시작하면 가을까지 채소 걱정은 안 한다. 물 주고 예쁘다고 도닥거려 주면 배신하지 않는 자연이다. 오랜만에 핀 개나리와 앵두나무는 꽃이 떨어지고 사과 꽃이 만발한다. 마가목 나무 자작나무가 꽃을 피우고 밥풀꽃 나무도 하얀 꽃을 피우는 아름다운 봄이다. 생명이 넘치고 살아 있음에 감사하는 봄이다. 죽음의 겨울이 지나 새로 피어나는 봄은 희망이 넘친다. 푸르른 나무와 들판을 보면 언제나 봄인 것처럼 겨울은 잊힌다.


하늘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다니는 평화로운 아침이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으면 찾아오는 행복을 만난다. 저마다의 임무를 성실히 이하며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나무들을 보고 해마다 피고 지는 들꽃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다. 바라지 않고 비우는 마음을 찾아다니는 평화 속에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며 산다. 봄을 먼저 알려주는 민들레 꽃이 만발하더니 하얀 홀씨가 되어 세상을 날아다닌다. 마치 눈처럼 하얀 홀씨가 시야를 가리휘날린다.


머나먼 타국에서 뿌리를 내리며 사는 이민자의 세월이 길어진다. 삶은 어쩌면 끝없이 이어지는 민들레 홀씨인지도 모른다. 무엇이 우리를 이곳까지 오게 했는지 모르듯이 민들레 홀씨도 날아다니며 어딘가에 씨를 퍼트린다. 하나둘씩 뿌려진 씨는 뿌리를 내리고 새 생명이 태어나는 신비한 자연의 이치다. 전쟁 중에도 아이가 태어나고 아무리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생명의 신비일 것이다. 어디선가 나무 씨가 옮겨졌는지 우리 집 에 있는 전나무 옆에 작은 나무가 자란다. 작년에는 가느다란 기둥으로 서 있더니 올해는 두 갈래가 되고 이파리가 제법 달렸다. 정원에 있는 나무들이 겨울을 보내고 5월이 가는데 봄이 온다.


(사진:이종숙)


작가의 이전글 꽃처럼... 우리네 삶도 피고 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