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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되면... 피고 지는 들꽃처럼 산다

by Chong Sook Lee


특별한 요리를 하지 않아도 매일 세끼 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만만치 않다. 결혼한 지 46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하다. 엄마음식만 먹다가 결혼한 뒤에는 요리책을 옆에 두고 따라 하다 보니 그런대로 음식 하는 게 손에 익어 제법 맛있다는 말을 들으며 살다가 이민을 왔다. 한동안 한식재료는 귀하고 양식은 할 줄 모르고 한참을 헤매며 쩔쩔매며 살았다. 세월이 약이라고 시간이 가서 귀동냥, 눈동냥으로 하나둘 배우며 음식을 만드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음을 알았다.


한식이나 양식이나 기본재료만 알면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재료값이 만만치 않은 것은 같지만 요령을 알면 그런대로 해결된다. 입에서 살살 녹는 고기가 비싸면, 질긴 고기를 사서 오래도록 익히면 고기의 진미가 나와 더 맛있다. 채소가 비싸도 그중에 가격이 저렴한 것을 사다가 해 먹으면 된다. 비싼 것을 사지 않아도 세상에는 먹고살 수 있는 것이 있다. 머리를 쓰고 손을 움직이면 비싼 음식을 고급지고 맛있게 해 먹는 비결이 있다. 케이크이나 쿠키 같은 디저트도 기초를 알면 만들기 쉽고 재료값도 별로 안 든다.


옷이나 그릇도 유행은 있지만 처음에 유행을 따르지 않고 무난한 것을 고르면 닳아서 못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어쩌다 유행하는 물건들이 예뻐 보이고 갖고 싶어서 사면 결국 몇 번 쓰고 싫증이 나서 구석에 놓아두는 경우가 많다. 살아가는데 좋아하는 물건 몇 개 만 있으면 그리 많은 물건이 필요 없다. 옷장과 신발장과 그릇장이 넘쳐도 좋아하는 몇 가지를 사용한다. 사람은 눈의 즐거움과 입의 즐거움과 귀의 즐거움에 약하다. 아무리 좋은 구경도 식후경이라는 말처럼 배가 불러야 한다.


사람이 좋고 친구가 좋아도 만나면 기분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사람에게는 그 사람만의 향이 있다. 아무리 친절하고 잘해주어도 정이 안 가는 사람이 있고, 말이 없고 냉정하게 보여도 말 한마디로 정이 가는 사람이 있다. 오래 만나도 쑥스럽고 어색한 사람이 있고, 새로 만나도 백년지기처럼 편한 사람이 있다. 며칠 전에 큰아들이 헌 옷 하나를 가지고 와서 꿰매어달라고 했다. 양쪽 팔뒤꿈치와 양쪽 손목이 낡고 해져서 너덜너덜하고 어깨 중간의 목 쪽에도 커다란 구멍이 있었다. 아마도 20여 년은 입은 것 같은 옷이다.


아들이 웃으며 떨어진 것 아는데 너무너무 편해서 버리고 싶지 않단다. 재봉틀을 꺼내어 이리 박고 저리 박으며 떨어지고 터진 곳을 다 박아 주었더니 만족하며 밝게 웃던 모습이 생각이 난다. 새것도 좋고 유행하는 것도 좋지만 입어서 편한 게 최고인 것 같다. 물론 집이나 공원에 나갈 때 외에는 입지 않지만 때때로 편한 것을 중시하는 경우가 많다. 오래전 막내가 어릴 적에 다 떨어진 수건을 버리지 않고 팔에 보물처럼 안고 다니던 것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나중에 사정사정해서 버리긴 했지만 지금도 그때 그 수건을 이야기하며 웃는다.


나에게는 아주 편한 구두 한 켤레가 있다. 어디를 가도 나와 함께 하는 구두인데 신고 있으면 가볍고 더러움도 잘 타지 않고 부드럽고 편하다. 구두끈도 없이 발만 집어넣으면 되고, 검은색이라 어느 옷에나 어울린다. 너무 파지지 않고 높지도 않아 여름에도, 겨울에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상관없이 무난하다. 우연히 사게 된 구두인데 가격도 착하고, 모양도 착한 구두 덕분에 어디를 가도 편하다. 의외로 사람들은 작은 것으로 행복감을 느끼며 산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보면 행복하고, 밀려왔다 달려가는 파도를 보면 행복하다.


피곤한 한낮에 단잠을 자고 일어나면 행복하고, 더운 여름에 더위를 식혀주는 소나기를 맞는 것도 좋다. 비 온 뒤에 떠오르는 오색 무지개를 보는 것도 좋다. 세상에는 재물과 권력보다 더 좋은 것들이 많다. 아가들의 천진한 웃음소리가 좋고, 새벽에 들려오는 참새들의 수다소리도 좋다. 유명한 곳을 찾아가서 새로운 구경을 하는 것도 좋고, 조용한 숲을 걸으며 하늘과 나무들을 보고 들꽃과 이야기하는 것도 좋다. 인생을 즐기는 것이 사람마다 다르고, 좋아하는 성향이 다르다.


슬플 때는 울고, 기쁠 때는 웃으며 단순하게 걱정 없이 아이들처럼 사는 것 또한 좋다. 어제 무엇을 하고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하지 않고 산다. 오늘 내게 온 하루를 순응하며 살아가면 된다. 세상에 나온 것은 세월 따라 낡아간다. 오랜 세월을 사용한 몸이 조금씩 불편해지고, 아픈 곳도 생겨나지만 그런대로 견디면 된다. 아침을 먹고 놀다가 점심에 무엇을 먹을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있는 대로 먹으면 된다. 오늘은 하루종일 구름이 껴있다. 오늘 같은 날은 손칼국수나 부침개를 해 먹고 싶다. 손가락 조금 움직이면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으니 다행이다.


위대한 것을 하는 것도 좋지만 평범하게 살아가며 잘 먹고 잘 자고 잘 노는 것도 좋다. 순간순간 변하는 세상을 따라가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새로운 것을 빨리 배우는 것도 좋지만 아날로그의 삶을 사는 것도 괜찮다.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잠을 자며, 내게 온 삶을 천천히 사는 것도 좋다. 남들을 의식하고 따라가다 보면 스트레스도 생기고 힘이 드는데, 때가 되면 피고 지는 들꽃처럼 평화로운 마음으로 살면 된다. 점심때가 다가온다. 오늘 점심은 무엇을 해 먹을까? 하며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먹을 것으로 꽉 차있다. 그중에 하나 꺼내어 먹으면 된다.


(사진:이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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