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 위에 서리가 하얗게 내려있다. 하늘은 낮고 온통 회색이라 뭐라도 내릴 듯하다. 눈이 와도 놀라지 않을 때이지만 눈대신 비가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커튼을 열고 돌아서는데 굵은 함박눈이 쏟아지며 지붕을 순식간에 덮는다. 이대로 눈이 계속 오려나 하는데 오던 눈이 멈춘다. 잠시 겁을 주던 눈으로 길은 조금 젖는 듯하더니 이내 말라버린다. 눈이 오려면 제대로 오지 오는 척하더니 끝났다. 다행이다. 아직 10월인데 눈이 오면 안 되지. 혼잣말을 하며 회색하늘을 쳐다본다. 들판에 가있던 참새들이 돌아와서 나뭇가지에 앉아 논다.
집 주위에 나무가 많아서 여러 종류의 새들이 오고 간다. 며칠 전에는 살이 통통한 블루제이가 담장에 앉아서 노래를 하더니, 오늘은 참새들이 집 앞뜰을 걸어 다니며 무언가를 찍어 먹는다. 오랜만에 놀러 온 까치도 지붕에 앉아있고 앞 집 담장에는 다람쥐가 급하게 달려간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모두들 먹고살기에 바쁘다. 여름 내내 덤벼들던 모기도, 벌도 이제는 사라진 지 오래되어 기억에서 사라지고, 앞으로 다가오는 겨울에는 눈과의 싸움이다. 추워도 눈이 안 오면 좋을지, 눈이 와야 좋을지는 자연이 알아서 할 일이다.
겨울을 좋아하는 사람, 여름을 좋아하는 사람, 사람마다 다르다.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받아들이며 살 수밖에 없는데도 괜한 욕심을 부린다. 겨울이 싫어도 겨울이 지나야 봄이 오기에 겨울과 사이좋게 잘 지내야 한다. 이제는더위도, 추위도 잘 견디지 못하는 세월이 지난다. 조그만 더워도 못 견뎌하고, 조금만 추워도 겹겹이 껴입는 것을 보면 나이 들어도 참을성이 많아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10월인데도 밤에는 영하로 내려가는 온도이다 보니 아침나절에는 두꺼운 쟈켓을 입고 털모자를 쓰고 산책을 간다.
숲이라서 나무가 많아서인지 바람이 그리 차지 않지만 혹시라도 추운 기운 때문에 감기라도 걸려 고생할까 봐 미리 챙긴다. 내의를 입으면 스타일 구길까 봐 추워도 참고 얇은 옷으로 멋 부리던 시절은 옛이야기가 되었다. 나뭇잎이 다 떨어져 산책로를 덮고 누워있는 낙엽들이 검게 변하여 가루가 되어 간다. 낙엽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곳이 더 많다. 길가에 서 있는 마른풀들도 죽음의 모습이 되어 바람 따라 흔들린다. 이제 자연은 생을 다하고 겨울을 맞는다. 휑한 숲에는 넘어진 나무들이 엉켜 누워서 하늘을 보고 있다. 언제 봄과 여름이 지나갔는지 흔적조차 없다.
인간의 최후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서로 싸우고 지지고 볶으며 살다가 때가 되어 갈 때는 저 마른 낙엽이나 풀처럼 될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허망하다. 스위스에서 죽음의 조력 캡슐에 대한 여러 가지 논란이 계속된다. 인간이 자신의 의지대로 태어나지 않았지만 죽음의 선택은 할 수 있는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어차피 인간은 죽지만 더 이상의 고통을 거부하며 자신의 죽는 시간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사는 것이 힘들어 희망이 없는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유 없이 생을 마치고 싶은 사람은 없다.
가을은 아름답지만 허무하기도 한 계절이다. 한 해 동안 아무것도 해 놓은 것이 없어 보일 때 허송세월을 보낸 것 같아 더 아쉽다. 하지만 세상사 모두 그렇게 허송세월 속에 사는 것 아니겠는가? 먹고 자고 일하고 하다 보면 나이가 들고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면 후회와 미련만 남아도 돌아갈 수는 없다.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별단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고쳐 쓰지 못하고, 변하지도 않은 것이 인간이라고 한다. 태어난 대로, 생긴 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 때가 된다고 한다. 그냥 지금껏 살아온 대로 살면 된다. 남들과 비교하며 시기 질투 할 것이 아니고, 각자 나름대로 할 일 하며 사는 것이 마음 편하다.
영원할 것 같은 모든 것들은 세월 따라 변하고, 떠나고, 없어진다. 좋은 것이 시시해지고, 모르고 살던 것들과 재미있게 놀며 살아가는 것도 괜찮다. 사람들을 믿고 의지하며 사는 것이 최고라고 하는데 변덕 많은 사람들의 마음 때문에 그것도 쉽지 않다. 혼자 좋아하는 것 하며 하루하루 살면 된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좋고 너도 좋으면 되는데 세상사 그게 쉽지 않다. 이렇게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면 봄이 올 때까지 겨울과 함께 살아야 한다. 겨울 동안 그동안 미뤄두었던 집 정리나 해야겠다. 귀찮아도 해 놓고 나면 기분이 좋다. 싫어도 같이 있다 보면 정이 드는 게 인생사라고 한다. 싫다 싫다 하면 더 싫어지고, 좋다 좋다 하면 싫던 것도 좋아질 수 있다.
하루하루 기운은 없어지고, 나날이 정신도 없어지는데 그냥 놀기만 하고 세월을 까먹고 있으니 한심하다. 쓰레기를 놔둔다고 떡 되는 것 아니니까 버릴 것 버리고 정리나 해야겠다. 가만히 앉아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 제법 철들어 가는 것 같은데 철들면 안 되니까철없이살다 철없이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