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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ng Sook Lee Nov 28. 2024

몸이 시키는 대로... 마음이 시키는 대로


미루던 리를 하니 기분이 좋다. 집을 청소하다 보면 구석에 숨겨져 있어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발견한다. 헌것이든, 새것이든, 고향친구 만난 듯 괜히 반갑다. 사용하다가 한동안 안 쓰다 보면 잊었다가 다시 보면 옛날에 쓰던 정으로 새삼스럽다. 물건이라는 것이 사기는 쉬워도 버리는 것은 어려워 이리저리 밀쳐놓고 보이지 않는 곳에 놓기 일쑤다. 버려야지 하면서도 버리지 못하고 나중에 버리려고 상자에 넣고 선반에 올려놓으며 잊힌다. 날씨가 춥고 눈이 많이 쌓여서 외출은 뒤로 미루고 하나둘 밀린 정리를 한다.


박스를 들추어보니 몇 년 지난 서류들이 내 손길을 기다린다. 너무 일찍 버렸다가 찾게 될까 봐 차곡차곡 모아 놓은 것이 다. 꺼내서 다시 하나하나 정리를 해보니 모두 버릴 서류라서 땔감으로 밀어 놓았다. 또 하나 커다란 상자가 보여서 무엇인가 열어 보았더니 입지 않는 옷상자이다. 틈틈이 버린다고 버렸는데 아까운 생각에 버리지 못하고 놓아둔 것이다. 입을 게 있나 해서 열어보니 입을만한 게 몇 개 보인다. 바지와 윗도리 그리고 스웨터와 원피스가 가지런히 누어 잠자고 있다.


옷이나 그릇은 그냥 물건이 아닌 추억이다. 입었을 때 나이가 생각나고, 입고 다니던 장소도 생각난다. 그중에 크리스마스 파티에 갈 때 입었던 멀쩡한 드레스도 있다. 한번 꺼내서 몸에 대어 본다. 지금 입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새것인데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아 버리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무엇이든지 싫증 나면 버리던 시절이라서 앞뒤 생각 없이 상자에 넣어버리고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다. 사람이 사는 동안 얼마나 많은 걸 사고 버리는지 모른다.


사실상 생활에 필요한 것은 몇 가지 안 되는데 색상과 모양과 나이에 따라 물건을 사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살림이 늘어 결국에 쓰지 않고 버리는 경우가 많다. 사서 쓰다가 싫증 나거나 고장이 나면 버리고 새로운 물건을 산 것들이 엄청 많고, 버리려고 하면 멀쩡한 것 같아 못 버리는 경우가 많다. 식탁 세트가 2개가 있어서 하나는 버리고 하나만 가지고 쓸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큰아들이 집에 와서 이런저런 정리 이야기를 하다가 부엌에 있는 식탁을 버리고 싶다고 하니까 큰아들이 "멀쩡한 식탁을 왜 버려요?" 하며 펄쩍 뛴다.


정리가 필요한 나이지만 사실 아들말이 맞다. 식구들이 모이면 대식가가 되니 멀쩡한 식탁을 버리면 안 되는 게 사실이다. 둘이 사는데 살림이 너무 많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앞서고, 쓰다가 안 쓰는 물건은 결국에 가서 버려야 한다. 특히나 옷이나 그릇은 짐만 되고, 자리만 차지하기 때문에 틈틈이 버려야 하는데도 무슨 련이 있어 끼고 사는지 모른다. 살림도 모으는 재미가 있을 때뿐이지 두 식구가 냄비 한 두 개 있으면 충분하고, 입어서 편한 옷 몇 벌과 신발 몇 켤레만 있으면 된다.


둘이 살기에는 집이 크지만 어쩌다 아이들이 오면 자고 가야 하기 때문에 아직은 큰 집에서 살고 있다. 앞으로는  잔디 깎는 일도  힘들고 눈이 오면 눈 치우기도 벅차기는 하겠지만 할 수 있는 날까지 하며 살면 된다. 내일을 걱정하다 보면 오늘까지 재미없어지니까 내일은 내일이 알아서 하게 놔두면 된다.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몸과 마음은 제 할 일을 한다. 펄펄 뛰던 몸이 서서히 속도를 줄이고, 생각도 이런저런 준비를 하라고 한다.


이곳에서 만난 엄마 같은 친구가 있었다. 우리가 젊을 때 나이가 많았던 그녀는 혼자 사는 자신이 떠날 때를 대비해서 준비하는 것이 보여 이해를 못 했는데 이제 나도 그 나이가 되었다. 지금 당장이 아니고 언제라도 시간이 되면 가볍게 떠나는 연습을 해도 괜찮다. 살면서 만들어 놓은 짐들이 많을수록 힘들어진다. 기운은 하루가 다르게 없어지고 기억력이나 결정하는 능력도 점점 줄어드니 내가 뜻하고 원하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 하루하루가 오는 것은 그만큼 나의 시간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시간이 가서 그나마도 할 수 없는 시간이 오기 전에 조금씩 하다 보면 안 하고 있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다. 며칠 전에 내린 눈이 무거워 쩔쩔매는 늙은 소나무가 어깨를 늘어뜨리고 서있다. 소나무도 나이가 들어가는 게 보인다. 요즘에는 해가 짧아서 하루가 더 빨리 가는 것 같다. 해가 늦게 떠서 늦은 아침에도 어둡고, 해가 빨리 지니 서너 시가 되면 어두워진다. 여름에 밤이 거의 없는 백야 현상으로 잠 못 드는데 요즘에는 밤이 일찍 와서 인지 아홉 시만 되면 졸음이 온다.


잠이 안 오면 시간이 많을 텐데 잘 시간이 되면 잠이 쏟아져서 어떤 때는 잠이 안 왔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한다. 잠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세상사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저 몸이 시키는 대로 하고 살 수밖에 없다. 조금만 피곤해도 입병이 나고 조금만 움직여도 안 아픈 데가 없으니 기계가 낡아는 과정인 것이다. 무리를 해도 한숨 자고 나면 개운하던 몸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기계도 물건도 세월 따라 변하듯이 사람의 몸도 마찬가지 다. 남들보다 뒤질세라 악착같이 살아왔는데 이제는 천천히 살으라는 뜻일 것이다. 눈이 오거나 추우면 집에서 가만히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 며칠 외출을 하지 않는다고 큰일 나는 것 아니니 추우면 집에서 벽난로에 장작을 피우며 불멍을 때리고, 그동안 하지 못한 집안 정리를 하는 것도 좋다. 쓰레기를 백 년  쌓아놓아도 보물은 되지 않으니 틈틈이 버리고 살자.


(사진:이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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