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추우면 마음까지 추워진다. 그래도 하얗게 내려 땅을 덮고 있는 눈을 보면 마음이 포근하다. 창 밖에 쌓인 하얀 눈을 본다. 어쩌면 저리도 하얗고 고운지 바라볼수록 신비롭다. 하늘에서 내려온 눈에는 지상에 있는 온갖 더러운 공기가 다시 내려오면서 얼어서 하얀색으로 변한 것인데 너무 곱다. 더러운 줄 모르고 하얀 눈이 먹음직스러워서 손으로 먹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언젠가 하얀 눈이 너무나 예뻐서 세숫대야에 담아가지고 집에 들어와서 보니 더러운 흙탕물이었던 기억도 난다.
겉이 깨끗한 듯해 보여도 더러움을 안고 있는 사실을 알았다. 정직하고 성실해 보이고 의리 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사람의 마음속은 알 수 없다. 겉모습으로 칭찬을 받기도 하고, 오해를 받기도 한다. 말을 함부로 험하게 하거나 말을 너무 안 해서 오해를 받기도 한다. 사람들은 자기의 기준을 만들어 놓고 입방아를 찌며 상대를 판단한다. 모르는 사이에서 만남이 이루어지고 만나다 보면 정도 들지만, 모르던 상대방의 단점이 눈에 보인다. 단점이 보이고 이해하다가 결국엔 인내심이 바닥이 나고 관계는 끝난다.
좋은 시절에는 나쁜 모습도 좋아 보이던 것들이 싫어지면 좋은 모습도 모두 나쁘게 보인다. 차라리 만나지 않고 멀리서 바라보았으면 좋았을걸 하는 후회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게 사람들과의 관계이다. 살면서 오랜 세월 동안 수없이 바뀌는 게 인간관계다. 만나고 헤어지고 또 다른 관계를 맺어가며 살아간다. 친해지면 마음이 편해지고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더 가까워지지만 그로 인하여 헤어지는 경우도 많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지나갈 수 있는데 알고 보면 뜻이 다르기 때문에 더 이상의 연결고리가 없어진다.
어릴 적 영원할 것 같던 친구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조차 모르고 산지 오래다. 매일 만나는 이웃이 친구가 되어 살아간다. 나이가 들고 아이들 사는 곳으로 이사를 가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그동안 정들어서 서운한 마음이 들지만 떠나면 잊히는 게 현실이다. 하얀 눈아래에는 가을의 찌꺼기가 있는데 눈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눈이 녹는 봄이 오면 다시 더러운 것들이 하나둘 보인다. 하얗다고 깨끗한 게 아니고 검다고 더러운 것이 아닌데 인간의 눈은 보이는 것만 보고 싶어 한다.
처음 눈이 내렸을 때는 순백이더니 며칠 지나니 어디선가 낙엽이 날아와서 군데군데 지저분한 게 보인다. 결국 세상에는 아주 깨끗한 것도, 아주 더러운 것도 없는 것 같다. 좋고 나쁨과 더러움과 깨끗함이 함께 어우러져 세상을 이룬다. 미움은 사랑에서 오고, 사랑은 미움을 낳고, 의심은 또 다른 의심을 낳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부족한 인간이기에 완벽함을 추구하는 본능이 있어서 문제가 끊이지 않는 사회를 만든다. 평화를 위한 전쟁은 끊이지 않고, 의학이 발달해도 새로운 병이 생겨나 인간은 고통 속에 생로병사의 길을 걸으며 산다.
고통과 괴로움, 슬픔과 외로움으로 살아도 반짝하며 살며시 찾아오는 작은 기쁨이 있어 이어지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엊그제 온 폭설이 녹기도 전에 눈발이 하나둘 날리면서 쌓이기 시작한다. 바람보다 더 가벼운 듯 어디로 갈지 방황하다가 아무 곳에나앉는다. 나무 위에도, 자동차위에도 소복하게 쌓인다. 앞으로 며칠 동안 눈이 온다고 하는데 눈구경이나 실컷 해야겠다. 춤을 추며 내리는 눈을 보고 있노라면 어지럽다. 둥근 모습으로, 뾰족한 모습으로 때로는 널따란 모습으로 쌓여간다.
자신의 개성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모양으로 다듬고 내린다. 눈이 오고 쌓이다가 녹기 시작하면 질척거려도 봄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이제 시작된 겨울이라 친해져야 하는데 이렇게 자꾸 오면 싫어질지도 모른다. 첫눈이 오면 만나자던 친구와의 약속은 옛이야기가 되었지만 눈이 내리는 날은 여전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세상이 아름답다.
사진을 보다가 몇 년 전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구경하기 위해 다운타운에 있는 정부청사에 가서 찍은 사진이 보인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장식이 반짝이는 것을 보면 너무 좋아서 아이로 돌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눈이 내리고, 성탄 음악이 울려 퍼지는 것은 좋은데 어느덧 올해도 한 달 밖에 남지 않았다. 무엇을 하고 일 년을 살았는지 기억도 없는데 12월이 오고 크리스마스가 오니 왠지 모를 기대와 희망이 생긴다.
온 가족이 모두 모여서 먹고 마시고 웃는 시간이 온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눈이 와도, 바람이 불어도 걱정하지 않는다.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맞고 보내면 된다. 눈치우는 트럭들이 동네를 돌아다니며 눈을 치워서 길이 깨끗하지만 여전히 걸을 때는 조심해야 한다. 눈아래에는 보이지 않는 얼음이 숨어 있어서 까딱 잘못하면 넘어지고 미끄러진다. 몇 년 전에 남편이 집주위에 있는 얼음길에 소금을 뿌리러 나갔다가 엎어져서 눈썹주위가 찢어져 다섯 바늘을 꿰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너무 놀랐다. 사람들이 미끄러워 넘어져 다칠까 봐 걱정하던 본인이 다쳐 피를 흘리고 집에 들어온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눈이 오면 가만히 집에 있으면 좋은데 꼭 할 일이 생긴다. 의사와의 약속도 있고, 장도 봐야 하고, 이런저런 일을 안 하고 겨울을 살 수 없으니 조심하며 사는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겨울이 빨리 다녀가야 봄이 오니까 기왕 온 겨울을 너무 구박하지 말고 잘 달래서 보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