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처럼 인생처럼

by Chong Sook Lee


이젤에 하얀 캔버스가 올려져 있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하얀 캔버스는 언제나 설렘과 두려움의 대상이다. 며칠 동안 그림 하나를 가지고 씨름을 한 것을 생각하면 당분간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았는데 하얀 캔버스를 보니 오늘은 멋진 화병에 꽂혀있는 예쁜 꽃들을 그리고 싶다. 하얀 캔버스에 물감을 칠한다. 노란색과 하얀색 그리고 보라색의 꽃들을 꽂아본다. 군데군데 이파리들도 그려 넣어본다. 연한 녹색과 진한 녹색으로 크고 작은 이파리를 꽃들 사이에 집어넣는다. 한 다발의 풍성한 꽃다발을 화병에 집어넣어 보았다. 하늘색으로 화병을 칠하니 나름대로 그럴싸해 보인다. 꽃의 색에 따라 어둡고 밝은 색으로 배경을 정리하는데 배경색이 꽃색과 잘 맞지 않는다. 이런저런 색으로 명암을 맞추는데 색이 잘 안 나온다. 꽃색을 바꾸어 본다. 빨간색에 노랑을 칠하니 주홍색 꽃이 되었다. 노란 꽃과 잘 어울린다. 그런데 보라색과 주황색은 이상해 보인다. 꽃색을 바꾸고 나니 바탕색이 너무 칙칙해 보여 진한 색으로 칠해 보았다.


그런대로 마음에 들어 벽에 걸었는데 너무 꽃이 많아 화병과 발란스가 안 맞는다. 화병을 조금 크게 그려놓고 다시 그림을 보니 이파리 가 너무 많아 꽃을 몇 개 더 넣었다. 꽃도 이파리도 적당하여 괜찮은 듯한데 왠지 자연스럽지 않다. 마치 미장원에서 고데기로 머리를 꼭꼭 눌러 놓은 모습처럼 흐트러짐이 없다. 조화처럼 꼼짝 않고 화병에 갇혀 보인다. 조금씩 손을 대어 자연미를 더해본다. 작은 꽃망울도 집어넣고 기다란 줄기도 그려 넣으며 더 멋진 꽃들을 그려 넣으며 이리 보고 저리 본다. 그래도 자연스럽지 않아 마음에 안 든다. 꽃을 더 크게도 해보고 화병 아래 그림자도 그려본다. 이제는 내가 생각했던 꽃병의 모습의 두배가 되어 캔버스에서 꽃병이 뒤뚱 거린다. 꽃이 너무 많다. 진한 색으로 배경을 칠하며 그려져 있던 몇 송이의 꽃을 감추니 너무 어둡다. 다시 몇 가지의 색을 칠해보는데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밝은 배경에 몇 송이의 꽃을 작은 화병에 꽂은 그림을 그리려 했는데 전혀 다른 그림이 그려졌으니 아무래도 지워야겠다.


캔버스를 검은색으로 칠했다. 화병과 꽃들이 까만 페인트 속으로 없어졌다. 독학으로 배운 그림이라 처음 목적과 다른 그림이 나오기 부지기수이지만 오늘도 마찬가지이다. 지금부터는 검은색 바탕에 맞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페인트가 마르기를 기다려 나무를 그려본다. 숲을 생각하며 쭉쭉 뻗은 백양나무를 크고 작게 캔버 스에 그려 넣는다. 꽃들이 사라진 캔버스에 하얀 나무들이 서있다. 나무 몇 개를 그려 넣어 보지만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시 한번 캔버스에 다른 색으로 검은색을 지운다. 빨간색과 노란색 , 그리고 파란색과 초록색 …여러 색을 군데군데 칠해보니 붓에 페인트가 묻어서 캔버스는 이제 회색이 되었다. 자.. 이제 무엇을 그릴까.. 아무런 생각도 안 난다. 꽃에서 나무에서 머리가 돈다. 페인트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누가 하라고 한 것도 아니고 직업으로 하는 것도 아닌데 끝을 보고 싶은 강박관념 때문에 괜히 머리 뒤가 무겁다. 회색 바탕이 다 말라 또 페인팅을 다시 시작했다. 노란 꽃 몇 송이와 이파리를 그려 넣으니 회색 바탕과 제법 잘 어울린다. 꽃 가운데에 검정 꽃술을 그리니 꽃이 훨씬 멋지게 살아난다. 색이 있는 화분보다 속이 보이는 네모난 물병으로 그렸다. 몇 개의 줄기들이 얼기설기 꽂혀있는 모습이 마음을 편하게 한다.

처음에 그리려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 그려지듯이 우리네 인생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가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하며 방황하지만 결국 무언가를 해내는 인생길처럼 고비를 넘긴다. 뜻대로 되지 않고 하는 일마다 안될 때가 많은 인생 살이다. 생각대로 될 듯하다가 전혀 다른 곳으로 가버리 는 경우도 다반사이다. 배경이 좋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고 혼자 잘났다고 뽐낼 것도 없다. 누구나 와 잘 어울리며 이웃들과 화합하여 살기란 그리 쉽지 않다. 잘난것도 못난 것도 서로 어우러져야 빛을 내고 감싸 지는 것임을 그림을 그리며 새삼 배운다. 최선을 다하여 인생의 색을 칠해본다.


그림 하나 그리는 데에도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리는데 한평생 살아가는 인생길의 모습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하리라. 될 듯하다가도 삼천포로 빠지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밝음과 어두움과 멀고 가까움이 조화를 이루면 자연스럽듯이 우리네 인생 또한 기쁨과 슬픔이 어우러져 성숙한다. 어느 날 우리가 지난날들을 뒤돌아보며 자신에게 칭찬할 수 있으면 잘 살은 삶이라 생각한다. 때로는 주저앉고 싶고 도망치고 싶지만 잘 버티며 살아온 자신을 많이 칭찬하고 싶은 날이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며 무엇이 되었든 감사 속에 살아간다면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믿어본다. 아무것도 없었던 하얀 캔버스에 노란 꽃 몇 송이를 화병에 꽂아 놓으니 온 집안이 환하게 미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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