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색 장미꽃이 만발하는 6월 3일은 돌아가신 시어머니의 기일이다. 돌아가신 지 19년이 된다. 그러니까 남편과 내가 식당을 운영할 때이다. 어머니께서 위급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같이 갈 수 없어 급하게 남편 혼자 한국에 갔다. 어머니는 늘 건강하셨는데 갑자기 발을 헛디뎌서 옆으로 넘어져 대퇴골이 부러지는 바람에 수술을 하시고 일어나지 못하셨다. 형제들이 번갈아가면서 병시중을 했지만 병세는 악화되고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말씀을 듣고 형제들이 연락을 해왔던 것이다. 이국 만리 떨어진 곳에서 고향을 그리며 사는 우리는 공교롭게도 고국에 계신 누군가가 아프거나 위급할 때만 갔다.
한번 가려면 돈도 돈이지만 식당을 하는 우리로서는 문을 닫고 갈 수도 없고 사람을 더 채용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남편은 나 혼자 놔두고 가는 것이 마음이 걸린다고 하였지만 일단은 먼저 가서 어머니를 뵙고 오라며 급히 남편만 보냈다. 남편이 동생네 집에 기거하면서 병원에 계신 어머님 병시중을 하며 2주가 지났는데 어머니는 여전히 정신이 오락가락 하기는 해도 별일은 없으실 것 같아 남편이 다시 캐나다로 들어온지 일주일 만에 어머니께서 정정하신 목소리로 전화를 하셨다. 건강을 되찾은 듯하여 "어머니! 뭐든지 많이 드시고 건강하셔서 캐나다에 오세요. 열심히 드시고 빨리 회복하세요". 했더니 "그래, 그래, 너희들도 잘 살아라".라고 말씀하시고 통화를 끊으셨다. 그렇게 며칠 뒤에 친구네 집들이를 가서 놀고 있는데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식당을 일주일간 닫고 가기로 했는데 당장 다음날 새벽 비행기로 가기 전에는 입관식에 참석하기에 너무나 시간이 빠듯하다. 아는 여행사에 전화를 했지만 다음날 새벽에 가는 비행기표를 구할 수 없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장례식에 도착하지 못할 것 같아서 여기저기 수소문하고 있는데 평소에 친절하게 지내던 "해피 여행사" 이사장님 한테 전화가 왔다. 그때가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는데 평소 같으면 한참 잠을 잘 시간인데 딱한 우리 사정을 알고 그 늦은 시간까지 비행기표를 찾아보았다며 새벽 1시쯤 집으로 배달해주겠다고 연락이 왔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지금까지도 그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고 산다. 빡빡하게 사는 이민생활에 너나 내나 힘들게 살아가는데 자신의 일처럼 표를 찾아주신 그분 덕분에 새벽 5시 반에 공항으로 가서 8시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갈 수 있었다. 가시는 어머니의 얼굴 한번 더 보려고 멀리서 오는 우리를 위해 한국 병원에서는 입관식을 한 시간 늦추어 주었다.
곷사과나무 꽃이 만발했네요.(사진:이종숙)
마흔에 사랑하는 남편을 먼저 보내고 45년을 더 살다 간 어머니의 고운 얼굴을 본다. 7남매를 혼자서 최고 학벌까지 보내며 고생 속에서도 평생을 아름답게 사셨던 시어머니는 돌아가시기 며칠 전 전화로 우리에게 잘 있으라는 말씀을 하시고 그렇게 사랑하는 남편품으로 가셨다. 장례식을 끝내고 삼우제까지 지낸 우리는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꼼짝할 수 없었지만 캐나다로 돌아가기 위해 준비를 한 뒤 검은 상복을 입고 공항으로 향했다. 티켓팅을 하는데 서글서글하게 생긴 친절한 여직원은 생각지도 못한 큰 선물을 우리에게 주었다. 일반석을 일등석으로 업그레이드해주며 편안한 여행을 하라는 말까지 해주었다. 우리는 깜짝 놀라서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생전에 어머니는 외국에 나가서 고생하며 사는 우리를 무척 안타까워하셨는데 당신의 장례식에 오느라 고생한 아들 며느리한테 편안하게 돌아가라며 그 여직원의 마음을 통해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 살아생전에 한 번이라도 더 가서 뵈었어야 했는데 사는 게 뭔지 내일 내일 하면서 미루고 살다가 돌아가신 뒤에 나 찾아뵌 불효자를 어머니는 가시는 길에도 뒤돌아보시며 우리에게 일등석 자리를 마지막 선물로 주고 가셨다. 그날 우리는 비행기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으며 한잠 자고 일어났더니 캐나다에 도착했다. 일반석이라면 엄청 피곤했을 텐데 그 여직원의 배려로 우리는 다음날부터 일을 할 수 있었다.
살면서 이런저런 좋은 일이 있지만 어머니가 가신 슬픔은 컸어도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직 살만하다는 생각을 한다. 매일매일 일어나는 사기에, 살인에, 전염병에, 그리고 사고로 세상이 험악하지만 그토록 좋은 일도 있음에 어머님께 감사하는 마음이다. 멀리서 고생하며 사는 자식이라고 "너희들만 잘살면 소원이 없다". 고 하시며 안타까워하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7남매를 혼자 키우시면서도 외로운 내색을 한 번도 내지 않고 꿋꿋하게 사셨던 우리 어머니는 나의 시 어머니이지만 나의 롤모델처럼 존경하는 분이다. 기억력도 좋으셔서 친척들 이름뿐 아니라 생일과 기일을 일일이 기억하시며 챙기셨다. 우리가 이민 오기 며칠 전에 조상님들의 기일과 가족 모두의 생일을 적어 주시면서 멀리 가서 살아도 조상님과 가족을 잊지 말라하시던 말씀을 기억한다.
이민 간 아들, 며느리가 어찌 사는지 궁금하여 자식 한번 보겠다는 일념 하에 영어 한마디 못하시는 노인이 비행기를 타고 오셔보니 사는 것이 형편없어 집으로 가자던 어머니 덕분에 우리는 집도 사고 아이들 잘 키우며 잘 살아왔다. 아침 새벽에 일어 나서 단정히 앉으셔서 7남매를 위해서 지극 정성으로 기도하던 모습도 생각난다. "길이 아니면 쳐다보지도 말라". 하시고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면 제눈에는 피눈물이 난다". 며 "절대로 남한테 가슴 아프게 하지 말라". 던 말씀도 생각난다. 어릴 적 왜놈들한테 잡혀간다고 학교는 못 가셨지만 독학으로 한글을 배우시어 성경을 읽으시고 성가를 열심히 부르시며 자손들을 위해서 한평생 희생하고 기도하며 살다가신 어머니였다.
이제 많은 세월이 지났지만 생전에 셋째 며느리 사랑이 유난하시던 것은 잊지 못한다. 힘든 이민 생활 속에서도 알콩달콩 잘 살아가는 우리를 보시고 "둘이 만나 잘 살아서 보기 좋다". 하시며 "내 아들도 장가를 잘 들었지만 너도 시집 잘왔다". 고 말씀하시며 우리 둘을 치켜올리셔서 한바탕 웃었던 기억이 난다. 이민 초기에 여러 직장을 다니며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바쁘게 사는 모습을 보시고 가신 이후로 항상 우리를 걱정하시던 어머니인데 우리가 잘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해 죄송하기만 하다. 빨간색 장미가 아름답게 피어있던 어머니 가시던 날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자손들의 행복을 당신의 행복보다 더 좋아하시던 어머니의 기일을 맞아 큰절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