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따라... 비우는 마음

by Chong Sook Lee


비가 오려면 그냥 오면 되는데 무슨 생각이 그리 많은지 꾸물거리며 오지 않는다. 비가 올 것 같아 집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혼잣말을 하며 별 볼일 없는 하루를 보낸다. 특별한 날을 만드는 것보다 평범한 날을 만들기가 쉬운 줄 알았는데 시시한 하루도 생각보다 쉽지 않다. 시간이 없는데 할 일이 많아 밥도 못 먹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보내던 시절도 있었는데 하릴없이 빌빌대며 하루를 보내는 지금은 시간이 안 가도 시간은 간다.


아침인가 하면 어느새 저녁이고, 잠자고 나면 또 새로운 아침이다. 늙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무엇을 기다리는지 시간을 까먹으며 그냥 보낸다. 사람들 사는 것을 보면 열심히 사는데 나는 멍청하게 구경만 한다. 여행을 다니고 골프를 치고 사람들을 만나고 살림도 알뜰하게 하며 가는 것을 보면 나는 구경꾼이다. 여행도 귀찮고 골프도 안치는 나는 살림도 되는대로 대충 한다.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데도 열심히 하루 삼시 세끼 챙겨 먹고 적당히 산다.


석양이 지고 밤이 오고 내일이 오는데 아무런 걱정하지 않는다. 하루가 가면 그만큼 나의 삶도 짧아지는데 아까운 시간을 그냥 보낸다. 철이 없는지 생각이 없는지 계산 없이 산다. 시간이 많아서인지 오지 않는 봄타령이나 하고 날씨가 춥네 덥네 하는 날씨 타령이나 하고 산다. 하늘을 보고 날아가는 새를 보며 구름과 바람이야기를 하며 산다. 올해는 유난히 꽃이 만발하여 가는 곳마다 꽃구경에 빠져 산다.


봄은 봄대로 할 일을 하는데 나는 무엇을 하고 봄을 보내는지 모른다. 지난 연말에 아이들과 놀고 1월에는 딸네와 놀았다. 2월에는 아들네 가서 손주들 봐주며 시간을 보내고 3월에는 남편 생일 전후해서 아이들이 와서 정신없었고 4월에는 독감에 걸려 고생했다. 5월 초에 가족 여행을 하고 빅토리아에 사는 딸과 두 살짜리 손자와 놀고 보니 5월도 가고 있다.


세월은 잘도 간다. 뒤돌아 보지 않고 미련 없이 가는 세월 따라 나도 어느 날 갈 텐데 할 일은 언제 할지 모른다. 정리할 것들이 많은데도 게으름만 피운다. 때가 되면 다 버려야 할 것들인데 한꺼번에 하려고 미룬다. 몸만 빠져나가면 될 것 같은데 말도 안 된다. 여기저기 숨겨놓고, 감춰놓고, 쌓아 놓은 살림살이가 빤히 쳐다본다. 언제 정리하느냐고 정신 차리라고 한다. 남들은 야무지게 잘도 사는데 언제 철이 들것이냐고 눈치를 준다.


내가 안 하면 누군가 하겠지 하며 모른 체한다. 물건이 많지 않아 보여도 정리를 하려고 꺼내 놓으면 많은데 놀란다. 이민 초기에 식탁대신 신문지 깔아놓고 밥을 먹었는데 하나 둘 사다 보니 세월 따라 살림 부자가 되었다. 이제는 버려야 하는데도 아직은 아니라고 버리지 못하고 끼고 산다. 물건을 새로 사기는 쉽지만 멀쩡한 것을 버리기는 쉽지 않다. 어차피 쓸 만큼 쓴 물건이기는 하지만 쓸 때까지 쓰는 수밖에 없다.


요즘에는 물건이 싸고 모양도 예쁘고 쓰기에도 편리해서 새것으로 바꾸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한두 개 바꾼다고 달라지는 게 없으니 그냥저냥 쓰며 살아야 한다. 아이들이 남겨 놓은 살림살이를 가져가라고 해도 엄마 것부터 정리하라고 하며 안 가져가니 아이들 물건은 한 군데에 모아두는 수밖에 없다. 나중에 어느 날 때가 되면 가져갈 것이니 걱정 안 하기로 했다.


부모님이 생존해 계실 때는 사는 방식이 나와 다른 연로하신 부모님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다 방문할 때 가서 보면 여기저기 물건이 늘어져 있어서 나름대로 정리를 한번 해드렸는데 칭찬을 받기는커녕 야단을 맞았다. 늘 쓰는 물건을 보이는 곳에 놓아야 하고 손에 닿는 곳에 놓고 쓰셔야 한다며 말끔하게 치워 놓은 물건을 다시 옮겨 놓던 모습이 아직도 생각난다.


기억력이 좋던 시절에는 많은 친구들의 전화번호를 기억했는데 지금은 아이들 전화번호커녕 내 전화번호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세월이 간 것을 알게 된다. 아이들도 어느새 40대 중반이 되어가는 세월에 얼굴에 주름이 생기고 머리에도 흰머리 카락도 보이는 것을 보면 세월이 빠름을 느낀다. 세월은 말없이 왔다 가는 데 갈 준비는 안 하고 세월만 보내고 있으니 걱정이다.


지난 며칠 비가 오락가락하며 날씨가 궂어 집안에서 지내다 보니 정리할 것들이 눈에 보여 거슬린다. 정리는 버리는 것이라고 하는 말이 맞다.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생각하다 보면 버릴 게 없으니 눈 딱 감고 하루 날 잡아서 버려야 한다. 어차피 어느 날 버려야 할 물건들인데 조금 더 쓴다고 달라질 것 없으니 용기를 내자. 버리고 필요하면 다시 사면되는데 쓰지도 않고 자리만 차지하는 물건들에 치어 사는 것도 피곤하다.


부자들은 많은 물건을 소유하지 않는다고 한다. 평수를 계산해서 필요한 물건만 놓고 빈 공간을 넓게 쓰는 것이 그들의 삶의 방식이다. 물건이 많다고 부자가 아닌 세상이다. 물건을 사는 것은 돈이 필요하고 버리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세상에 나올 때 가지고 나온 용기로 한평생 살아왔으니 버리고 가는 용기를 가져보자.


꽃은 열흘 피기 위해 일 년을 기다리고, 인간은 떠나가기 위해 평생을 기다리며 산다. 물건을 많이 남기고 가는 것이 미덕이던 시대가 가고, 툭툭 털고 텅 비워 놓고 가는 것이 미덕인 시대에 산다. 사는 동안 줄 것 주고, 서로 나누며, 남겨놓은 것이 없으면 가는 길이 더 가벼울 것이다. 어차피 주먹 쥐고 태어나 살다가 주먹 펴고 가는 길인데 정리를 하면 새털처럼 가볍게 날아갈 것이다.


(사진:이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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