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 바라본 하늘은 구름이 많았는데 밤새 그 구름이 다 어디로 갔는지 지금은 구름 한 조각을 볼 수 없이 하늘이 맑다. 창문 옆에는 커다란 전나무가 잔잔하게 춤을 춘다. 6시도 안 되었는데 백야현상으로 밖은 환하고 해도 뜬 지 오래된 듯 세상이 밝다. 시계 소리만 들리고 집안은 고요하다.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지금은 새소리도 없다. 큰아들 네 식구가 우리 집에 온 지 6일째이다. 2살 4살짜리 손자 손녀가 잠을 깨면 집안은 시끌벅적 온통 정신이 없다. 절간 같던 집이 사람 사는 집으로 변했다. 오기 전에 집안 곳곳을 청소하고 정리를 해 먼지 하나 없었는데 오자마자 금방 아수라장이 되었다. 장난감과 옷들, 애들 먹던 컵과 신발이 여기저기서 둥글어 다닌다. 아무리 쫓아다니며 정리를 해도 해결이 안 된다.
어린것들 둘을 보면서 몇 달 동안 재택근무를 했다는 것이 기적이고 믿어지지가 않는다. 남편과 둘이 하루 종일 뒤쫓았다니며 저녁에는 초주검이 된다. 일하는데 밥이라도 해줘야 하니 나는 나대로 바쁘다. 하루 한 끼 먹는 것도 아니고 눈뜨면 먹어야 하는데 아침 먹고 나면 점심 준비하고, 먹고 나면 또 저녁 준비해서 먹어야 한다. 전염병 때문에 외출이 자유롭지 않은 요즘 반찬도 없고 재료도 시원찮은데 끼니때마다 걱정은 내 몫이다. 한창 젊은 나이의 아이들이라 뭐든지 해놓으면 맛있다고 잘 먹으니 다행이다. 이틀 전에는 손자 생일이라고 근처에 사는 작은 아들네 식구까지 와서 뒤뜰에서 바비큐를 하며 신나게 놀다 갔다. 언제나 엄마 음식이 그립다는 아이들에게 있는 것 없는 것 찾아서 만들어 놓으니 열식구가 오랜만에 좋은 시간을 가졌 다. 한집에 살지 않으니 거리를 두며 조심하여야 하지만 다 건강하니까 괜찮다.
전염병 때문에 못 만나던 식구들이 이렇게 만나서 밥 먹고 대화하며 놀으니 얼마나 좋은지 아이들은 하하호호 시간 가는 줄 모르며 함께 있다 갔다. 사람 사는 것 같았다. 손주들은 어제 생일 선물로 받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느라고 정신없다. 아무리 말을 해도 나이가 어리니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여기저기 장난감을 던지고 늘어놓고 다닌다. 밥도 가만히 앉아서 안 먹고 왔다 갔다 하며 뛰어다니다 넘어지고 울고 웃고 한다. 천방지축이지만 볼수록 예쁘다. 내가 아이들을 키울 때는 사느라고 바빠서 어떻게 지나갔는지 몰랐는데 손주들을 보니 새삼스럽게 예쁜 모습을 다 놓치고 살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철도 없었고 모든 것이 부족하던 시절이라 그냥 아이들만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만 지켜보다가 아무것도 못해주고 지나갔는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나의 최선이었다. 지금애들은 어려서부터 무언가를 배우고 가르치지만 그때는 컴퓨터도 핸드폰도 없었기에 삶은 정말 단순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느긋한 하루를 시작했다. 밥을 먹고 텔레비전을 조금 보다가 산책을 하며 운동장에 가서 아이들이 노는 것을 바라보며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서두를 것도 없고 배워야 할 것도 없이 나는 아이들의 엄마가 되고, 또래의 친구가 되어 함께 놀았다. 아이 셋을 탁아소에 맡기는 값이 내가 버는 수입보다 훨씬 많아서 차라리 애들 하고 집에 있으며 전업맘이 되었다. 다행히 나는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잘하지는 못해도 만들면서 행복하고 즐거웠다. 아이들과 놀면서 틈틈이 빵과 과자도 만들고 간단한 옷도 만들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혼자 책을 보고 배우며 연구하는 것이 좋아 모르는 영어단어는 사전을 찾아가며 열심히 배웠다. 아이들이 어려서 나라에서 이민자들을 위한 영어학교를 다닐 수 없었지만 나름대로 공부가 되어 사람들과의 소통도 어지간히 되었다.
세상은 초록이다.(사진:이종숙)
남편이 혼자서 일을 하니 경제적으로는 여유가 없어 힘들었지만 아이들과의 추억은 많다. 요즘은 부모 둘 다 나가서 돈을 벌고 아이들은 탁아소로 가는 것이 통례가 되었다. 아이들은 의례히 탁아소로 가는 것으로 알고 적응하며 살아간다. 한마디로 조기교육이다. 탁아소에 가서 사회성을 배우고 매너를 배운다. 아침 꼭두새벽에 자는 아기들을 깨워 옷을 입혀 준비를 하고 탁아소에 데려다 놓고 일을 끝낸 저녁이나 되어서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온다. 하루 종일 엄마 아빠와 떨어져서 지내던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그리워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집에 오면 저녁을 만들어 먹고 나면 씻겨 재우기 바쁘다. 매일매일 똑같이 반복하며 사는 것이 그들의 일상이었다. 탁아소에 두 아이를 맡기는데 한 달에 대략 250만 원 정도를 내야 한다. 그런 거금을 내며 아이를 맡기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은 외벌이로는 생활이 안되기 때문이다. 모든 것들이 비싸고 움직이면 돈을 써야 하는 세상이니 누구나 한 푼이라도 더 벌어보려고 하는 세상이다.
나 역시 아이들 나이 때 열심히 살았는데 지나고 보니 다 가질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뒤늦게야 알았다. 젊음은 그렇게 가고 아이들은 성장하고 남편과 나는 퇴직하여 사는 나이가 되었다. 일할 때가 있고 돈을 벌며 아이들을 낳아 키울 때가 있듯이 지금의 나는 휴식을 하며 아이들의 언덕으로 살아간다. 남편과 함께 이민을 와서 이제 3대가 되니 대식구가 되었다. 한번 만나면 작지 않은 우리 집이 꽉 차고 음식을 만들어도 많이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만나지 못한 지가 오래되어 그리웠었는데 힘든 아이들을 도와줄 겸 해서 오라고 했는데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좋다. 귀여운 손주들을 옆에서 가까이 보니 사는 맛이 난다. 남편과 둘이 살 때는 집안은 깨끗이 정돈되어 치울 필요가 없어 좋지만 아이들의 웃고 우는 소리가 들리니 이게 바로 사람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음 주 수요일까지 있다가 간다고 하니 있는 동안 만이라도 몸과 마음을 쉬고 에너지를 충전하고 가게 했으면 좋겠다. 자식이 자라 부모가 되어 살아가는 것을 보면 조금이라도 도와주고 싶은데 내 몸은 이미 늙어 옛날 같지 않음을 느낀다. 그래도 아이들은 부모가 늙은 것을 알아도 응석을 부리고 싶은지 아직도 부모는 무엇이든지 다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부모 앞에서 자식은 영원히 자식이다. 부모는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자식을 위한 것이라면 목숨조차 내놓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그렇게 키운 자식은 크고 자식을 낳아 부모가 되어 자식을 위해 희생한다. 세상은 돌고 돌며 삶을 반복한다. 더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가며 인류는 발전하고 다른 모습이 되어간다. 어린 손주들이 먹고 놀며 자는 모습을 보면 나의 아이들이 어렸을 때의 모습이 생각난다.
정신없이 사느라 힘들었지만 아이들이 잘 성장하여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대견하고 고맙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어린것들을 집에 놓고 일을 나가서 집에 올 때까지 가슴 조이던 날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안타깝고 미안하다. 세월이 흐른 지금은 아이들이 나처럼 자식을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바쁘게 살아간다. 나의 시절은 서서히 저무는 아름다운 석양이 되었고, 아이들은 중천에 떠서 세상을 비추고, 손주들은 아침 태양처럼 붉게 떠오른다. 그들이 살아가는 나날들이 사랑과 감사가 넘치는 행복한 날들이기를 원한다. 비빌 언덕이 없었던 우리하고는 다르게 우리가 바람막이 되어주며 그들의 가는 길에 힘이 되면 좋을 텐데 잘 모르겠다. 아이들이 경제적으로 우리에게 손 안 벌리고 우리가 아이들에게 기대지 않는 것만 해도 감사할 일이다. 세계경제가 무너져 내리는 현실이 어떤 내일을 가져올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