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집이 됐다. 아이들이 떠나니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집안은 고요하고 깨끗하다. 절간 같다는 말이 맞다. 손주들의 뛰노는 소리, 울고 웃는 소리, 쫓아다니며 할머니 할아버지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 그립다. 같이 사는 동안 정이 무척 들었는지 환청까지 들려 힐끗 돌아다본다. 하지만 다들 떠나고 남편과 나는 각자 할 일을 한다. 복잡하고 시끄럽던 시간이 하루도 지나지 않아 또 그리워진다. 어디를 가도 늘어져 있던 아이들 살림은 온데간데없고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 질서 정연한데 마음은 허전하다. 삼시 세끼를 해주며 손주들을 본 것이 힘들긴 했어도 다행히 아프지 않고 잘 넘어갔다. 오랜만에 집에 온 아이들에게 편하게 해주고 싶어 최선을 다했다.
3주간 아이들을 도와주고 손주들을 봐준다는것이 쉽지 않았지만 불평하지 않고 최대한 이해하며 잘 넘겼다. 몸이 알아 휴식을 원하면 쉬었다 하고 마음이 힘들면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다 보면 평화가 온다. 다 큰 아이들하고 산다는 것이 어렵지만 서로 노력하며 잘 지나갔다. 손주들도 적응하며 할머니, 할아버지의 존재를 알아가고 있는데 외갓집에 간다며 좋아한다. 서운하지만 아이들은 갔고 우리는 나름대로 우리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하늘은 맑고 새벽바람이 제법 차다. 어제 하루 종일 바람이 심하게 불더니 갑자기 가을이라도 온 듯이 선선하다. 며칠 째 더운 날씨로 시원한 곳을 찾아 옮겨 다녔는데 따뜻한 곳을 찾고 있으니 사람 몸이 참 간사하다. 모기장과 해먹 그리고 테이블과 그네로 뒤뜰에 꽉 차 있었다.
간이 의자도 놓여있었고 손주들이 놀던 작은 수영장도 있었는데 아무것도 없이 깨끗하다. 가을이 온 것처럼 뒤뜰도 텅 비어 있다. 쓸쓸한 뜰이 내 마음을 더 외롭게 한다. 내가 부모님을 방문했을 때도 이랬겠지 하는 생각에 부모님이 그리워진다. 한국에 한번 가면 2주 정도 머물다 온다. 두 분이 사시는 곳에 내가 가면 그분들의 일상이 깨지는 줄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아이들이 와있는 동안 하루도 내 생활을 할 수 없이 아이들에게 맞춰야 했다. 처음 며칠은 정신없이 지냈지만 다 적응이 되어 아이들과 손주들의 일상이 나의 일상이 되었다. 아침저녁으로 할 일을 하고, 낮시간엔 손주들과 놀고 때가 되면 식구들 밥을 해주며 살았다. 무엇을 해서 먹을까 걱정할 필요 없이 냉장고를 찾아보면 이것저것이 나온 다.
고기 종류와 찌개나 국 그리고 밑반찬 하고 먹으면 한 끼가 해결된다. 손님도 아니고 가족이니까 부담도 없고 뭐든지 잘 먹으니 좋았다. 도와주는 부모가 고마운지 아니면 철이 들었는지 아이들도 고분고분하고 어릴 적 같지 않아 힘들지 않게 잘 지나갔다. 이렇게 따로 나가서 살던 아이들도 들어와서 같이 살다 보니 살만하다. 아이들이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고, 우리도 손주들이 보고 싶지만 핑계가 없었는데 코로나가 계속되는 바람에 생각지 않게 손주들을 매일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한마디로 코로나가 가져다준 보너스였다. 단순하고 조용하게 살던 우리에게 엄청난 변화이지만 힘든 만큼 많이 웃고 많이 행복했다. 행복은 그냥 오지 않고 힘듦을 동반하고 온다.
노오란 쑥갓꽃이 예쁘게 폈다.(사진: 이종숙)
우리의 삶은 그렇게 고통스럽지도, 그렇게 편하지도 않다. 생각하기에 따라 천국이 되기도 하고 지옥이 되기도 한다. 잠시 들렀다 가는 짧은 여행길이 기쁠 수도 슬플 수도 있다. 매일매일 비가 오는 장마 철도, 무섭게 추운 겨울도 끝이 난다. 햇볕이 있어 눈을 녹이고, 젖은 세상을 말리듯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시작과 끝이 있다. 오지 않을 듯해도 오고, 가지 않을 것 같아도 간다. 나와 영원히 함께 할 것 같은 세월도 어느 날 나를 떠나갈 것이다. 옷을 입고 옷을 벗는 계절처럼 오고 간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지만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어딘가를 흐른다. 아이들의 아이들 그리고 그 후에 태어나는 후손들에게 전해진 다. 바람이 어느덧 찬기운을 담고 나무들은 힘없이 흔들리고 손주들이 없는 집안도 힘이 없다.
집안 구속 구석에 스며있는 손주들의 흔적이 그리움이 되어간다. 이별을 모르는 아이들은 이리저리 뛰며 왔다 갔다 한다. 내일 아니 조금 있다가 만나리라 생각할 것이다. 헤어지면 보고 싶고, 안 보면 잊은 채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불과 몇 시간 전 만해도 뒤뜰에서 왁자지껄 떠들며 웃던 아이들이 떠나간 뜰엔 새들이 차지하고 어디서 날아온 나비도 덩달아 바쁘다. 이렇게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면 코로나도 잠잠해질 것이다. 어디선가 흘러온 구름이 하늘을 덮고 해는 잠시 구름 뒤에서 휴식을 취한다. 여름내 빨갛게 불타던 장미도 다 시들고 어딘가에서 놀러 와서 뿌리를 내리고 피는 개망초는 꽃이 만발했다. 한 뼘도 안 되는 나무 하나가 뻗어가며 꽃을 피우는 모습이 이민 와서 이곳에 뿌리내리고 자손을 번성시키고 사는 남편과 나의 모습을 닮았다.
40년 전 둘이 손잡고 캐나다에 와서 12명의 식구가 되었고 앞으로도 계속 번성할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뿌듯하다. 비바람을 견디며 죽지 않고 수많은 꽃을 피우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여러 가지 생각이 난다. 필요함을 알고 있는 지으신 이의 뜻대로 나날을 산다. 부족해도, 남아도 내것은 정해져 있으니 욕심내지 말자. 가지고 갈 것도 아니니 있는 것에 만족하며 없는 것을 바라지 말자. 만날 인연이 되면 끌어안고, 보낼 인연에는 잡으려 하지 말자. 돌고도는 인연에 연연하지 말고 바람처럼 계절처럼 살아가자. 꽃을 보고 나무를 보니 바람에 맡기고 세월에 맡기며 살아가는 그들이 부럽다. 흔들거리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새들과 노래하고 벌들 에게 꿀을 만들어주며 짝을 만나 사랑하며 살아간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