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가지 않아도 좋은... 지금의 삶이 좋다

by Chong Sook Lee


사과가 빨갛게 익어가는 계절(사진:이종숙)



끼니때가 되면 배가 심하게 고프지 않아도 밥을 먹는다. 간단하게 먹고 조금 놀다가 자면 속도 편하고 좋을 텐데 그냥 의무적으로 먹는다. 먹다 보면 맛이 있고, 배는 부르지만 남기지 않고 그릇에 있는 것을 다 먹고 고생을 한다. 아침을 먹고 운동을 다녀오면 점심은 꿀맛이라서 잔뜩 먹고 나면 숟가락 놓자마다 식곤중이 몰려와 잠이 쏟아진다. 낮잠을 자면 밤에 잠을 설치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안 자려고 노력하지만 어떤 때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한 숨씩 자고 일어난다. 안 그래도 짧아져가는 시간에 낮잠까지 꼬박꼬박 챙기면 어쩌려는지 한심하다. 오늘도 두 시간을 걷고 와서 밥을 먹었더니 잠이 와서 아침에 그리던 그림을 꺼내 마지막 마무리를 하고 견디다 못해 한숨 자고 일어났다.


할 일도 없고, 내 맘대로 하고 싶은 대로 살면 되는데 때로는 잠이 오는 자신이 싫다. 남들은 12시까지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고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 골프를 치러 가는데 나는 밤 열시만 되면 졸려서 초주검이 된다. 여간해서는 낮잠을 모르고 평생 살았는데 요즘엔 가끔씩 자게 된다. 찾아보면 집안에 할 일 투성이지만 손가락 꼼짝 하기 싫다. 간신히 저녁이라고 꿇여 먹고 잔뜩 부른 배를 소화시키기 위해 앞뜰로 나와 본다. 옆집은 집을 팔려고 복덕방에 내놓았는데 한 달이 넘도록 안 팔린다. 얼마 전 동네를 걸어가다가 집주인을 만났는데 빨리 집이 팔리면 좋겠다고 하던데 아직도 좋은 소식은 없나 보다. 주인 남자가 손재주가 좋아 재료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뚝딱 잘 만들어 집이 말쑥하다.


직업이 없고 부모가 사는 고향으로 내려가고 싶다는데 심심하니까 일을 자꾸 만들어한다. 요즘에 직업도 없고, 살기 힘들어서 집을 사려고 하는 사람들이 없을 것 같은데 누군가 사면 집을 잘 고쳐서 살기는 편할 것 같다. 소화를 시키려면 동네 한 바퀴는 돌아야 할 것 같아 집을 나선다. 집집마다 하고 사는 모습이 각양각색으로 다양하다. 꽃을 많이 심어놓고 예쁘게 치장한 집이 있고, 꽃 하나 없이 나무 하나 덩그러니 심어놓은 집도 있다. 앞만 예쁘게 해 놓고 뒤뜰은 엉망으로 해놓고 사는 집도 있다. 여름이 가는데도 여전히 예쁜 꽃을 키우며 사는 집을 지나갈 때마다 우리 집이 아닌데도 그냥 좋다. 지저분한 집은 뒤도 안 돌아보고 휙 지나가고 예쁜 집은 천천히 여기저기 보며 지나간다.




우리집 뒤뜰에서 빨갛게 익어가는 마가목 열매(사진:이종숙)



겨울이 길고 날씨가 추운 이곳은 고산지대에서만 자란다는 마가목 나무가 많다. 거의 집집마다 한 그루씩은 있는데 열매들이 빨갛게 익어가고 있다. 여름이 짧지만 건조하고 습하지 않아서인지 사과나무도 많이 키운다. 우리 집에도 사과나무가 2그루 있는데 올해는 꽃을 솎아주어 사과알이 많이 굵어진 것 같다. 하나는 조생종으로 8월 말이면 다 익어 떨어지고, 또 하나는 만생종으로 10월에 서리를 맞은 뒤에 추수를 한다. 동네를 돌아보니 집집마다 사과가 빨갛게 익어간 다. 꽃사과부터 주먹만 한 사과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 8월 중순인데 벌써부터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분다. 더워서 쩔쩔매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사람들은 긴 옷을 입고 걸어 다닌다.


우리 집에서 가까운 곳에 성당이 보인다. 주일마다 많은 사람들이 미사를 보고 여러 가지 행사를 하던 곳인데 아무도 없이 쓸쓸하다. 전염병으로 성당이 닫히고 교인들의 장례식은 식구들 몇 명이 참석하며 몇 달 동안 사람들의 발걸음이 거의 없다. 집에서 가깝기 때문에 틈틈이 찾던 곳인데 그냥 지나친다. 사람이 모이던 곳에 사람들이 없으니 보기가 이상하다. 어서 빨리 모든 일상이 정상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어느새 성당 주위의 나무들이 하나 둘 물들어 가는 모습에 무심코 하늘을 바라보게 한다. 구름이 하늘을 덮어가며 아직 더 기다리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성당 앞에 피어있는 진분홍 야생 장미꽃도 힘없이 시들어 간다.



어둠에 묻혀있는 성당의 모습이 쓸쓸하다. (사진:이종숙)



해도 짧아져서 저녁을 먹고 걸으면 그림자가 엄청 길어진 것을 알 수 있다. 하늘은 점점 높아지고 잠자리들은 정신없이 날아다니며 전성기를 맞지만 나무나 풀들은 다들 힘이 없어 보인다. 가을을 맞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겸손한 모습으로 조용하다. 한여름 신나게 살더니 어깨가 축 늘어져 있는 모습 같다. 색도 조금씩 가을색을 띠고 순명의 자세를 하고 있는 듯하다. 이제 남은 여름을 마무리하며 멋스러운 가을을 만들어야 하기에 내심 바쁘다. 나이 든 나무는 몇 년 사이에 병도 들고, 어린 나무는 몰라보게 자랐다. 꽃구경과 나무 구경에 정신없이 동네를 한 바퀴 돌아 어느새 우리 집이 보인다. 마가목 열매가 익어가고 황혼이 멋지게 하늘에 그림을 그리는 아름다운 저녁이다.


각자의 인생을 예쁘게 그리며 살아가는 이 동네에서 31년을 살다 보니 이곳은 나의 고향이 되어 다른 곳으로 이사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동네가 아이들 소리로 시끌시끌했는데 지금은 새소리만 들릴뿐 조용한 동네가 되었다. 아이들은 자라서 나가고 나이 든 어른들만 조용히 살아간다. 길 건너 학교 운동장에 아이들 소리가 들린다. 학교 근처에 사는 아이들 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지고 오늘 하루도 서서히 저물어 간다. 어제는 가고 오늘도 어제가 된다. 내일은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날까 궁금하다. 세월이 가는지 오는지 모르며 바쁘게 살아왔는데 내가 살아온 길을 아이들이 걷는다. 하늘을 바라볼 시간도 없이 그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야 세월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으니 참으로 삶을 알 수가 없다.


너무 먹고 소화를 시키기 위해 나선 동네길에서 남편과 나는 지금 우리의 삶을 하나 줏어들고 들어간다. 바쁠 것도 없고 기를 쓸 것도 없는 지금의 삶이 좋다. 쫓아갈 필요도 없고, 달려갈 필요도 없이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고, 다리가 아프면 쉬어가며 살아가는 지금의 내 삶이 좋다.


지금껏 살아와서 좋고,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도 뛰어가지 않아도 좋은 지금 나는 행복하다.



석양이 하늘에 멋진 그림을 그린다.(사진:이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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