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생활 3년이 되는 백수의 생일날이다. 22년 동안 열심히 운영하던 식당을 팔고 3년전 오늘 백수로 입문하던 날의 기억이 새삼스럽다. 특별히 한 것은 없어도 백수로의 책임을 다하려 노력하고 살았던 지난 3년이다. 먹고, 자고, 놀며 그동안 못하고 살았던 백수의 생활을 충실히 했다. 양심에 거리낄 것도 없고 미안할 필요도 없이 마냥 늘어져서 자고 싶으면 자고, 놀고 싶으면 놀며, 먹고 싶은 것 먹어가면서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살았다. 옆길 한번 보지 않고 앞만 보고 살아온 이민생활 37년의 직업인으로서의 종지부를 찍은 날이다. 이곳에 이민 온 다음날부터 한 것이 있다면 열심히 살아온 것이다. 아무도 없는 이곳에 오던 40년 전 그 날의 하늘은 맑고 푸르렀고 끝없이 펼쳐진 평야는 희망으로 가득했다. 세 아이를 낳아 기르며 행복했던 날도 있고, 힘들어서 쓰러질 뻔했던 날들도 있었고, 다시는 일어설 수 없다는 생각이 들던 날들도 있었다.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던 날들도 있었고, 이곳에 이민 온 것을 후회한 날도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보이지 않는 그분의 손길이 없었다면 오늘 내가 없다는 것을 시간이 갈수록 실감하고 감사한다. 내가 한 것은 그저 살기 위해 살았을 뿐 특별히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넘어져 울 때 누가 일으켜 주었고, 배가 고플 때 누가 음식을 살 수 있는 돈을 벌게 해 주었나 생각하면 누군가의 이끄심으로 살아온 것임에 확실하다. 잘나지도 않고, 넉넉하지도 않고 , 가진 것 없고, 보잘것없는 우리를 오늘날의 떳떳한 백수로 살아갈 수 있게 한 손길로 여기에 있다. 얼마나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인가? 많은 사람들이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세상에 근심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음은 기가 막힌 행운이다. 사람이 태어나 죽는 날까지 겪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어쩌다 찾아오는 기쁨이라는 선물로 하루하루 버티고 산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인생이 고달프다고 말한다.
가을을 맞으며 최고의 모습을 보이는 모습(사진:이종숙)
무심한 가운데 혼자 걸어야 하는 외로운 인생길이다. 내가 잘 나갈 때는 남이 나를 알아주고, 내가 힘들 때는 내가 남을 알게 된다고 한다. 냉정한 현실 속에 하루를 버티는 것은 내일을 향한 희망이 있기에 가능하다. 오늘 내가 아무런 걱정 없이 백수가 될 수 있는 것은 젊은 날의 아픔과 고통을 이겨낸 결과이다. 살기 위해서 기를 쓰고, 필요에 의한 삶을 선택했기에 내가 지금 이곳에 있다. 원하는 것을 잠시 미루고 살아온 결과이다. 바보같이 살아왔지만 지금 나는 행복하다. 남들이 웃고 놀러 다니며 인생을 즐길 때, 새벽 5시에 일어나 식당 문을 열어야 하기에 놀다가도 벌떡 일어나 집에 가는 우리를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또래들은 여행을 가고 골프를 치며 인생을 재미있게 살아갈 때 우리는 식당을 지키며 살아왔다. 누구나 일을 하고 열심히 살지만 주변머리 없는 우리는 그냥 한길만 걸었다.
한 곳에서 식당을 오랫동안 운영하며 때로는 맘씨 좋은 엄마처럼, 때로는 인자한 할머니처럼 인정을 베풀며 한 우물을 파고 살았다. 많은 사람들이 식당 문을 열고 들어오며 "엄마! 배고파요".라고 외치며 뛰어 들어와 앉아서 밥을 먹던 기억도 난다. 온몸에 문신을 하고 떼를 지어 다니며 음악을 한다고 까불고 몰려다니던 아이들이 철이 든 뒤로 선생님도 되고, 박사도 되는 것을 함께 기뻐하며 살았다. 결혼을 하고 짝을 데려오면 축하해주고 아기를 낳아 함께 오면 선물로 밥을 주었다. 부모를 잃고 슬픔에 잠겼을 때 따뜻한 밥 한 그릇을 주며 위로해 주고 방황하며 아파할 때 "너는 할 수 있다".라고 용기의 밥 한 그릇을 주었다. 6.25 때 알지도 못하는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 가서 용감하게 싸워준 참전용사가 오면 우리나라를 위해 싸워준 게 너무 고마워 감사의 밥 한 그릇으로 대접했다. 힘들 때 누군가가 주는 밥 한 그릇의 의미는 크다. 친구들과 웃지 못한 시간들은 아픈 이들과의 나눔으로 이어지고 고마움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은 지금껏 우리를 그리워한다.
석양이 만들어 놓은 가을(사진:이종숙)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은 백수생활 3년 동안 돌이켜보니 많은 일을 했다. 그림을 그리고, 수영과 운동을 하고, 여행을 하고, 산책을 하며, 브런치에 글을 올리며 잘 살아간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고 내 맘대로 살아가는 삶이다. 그동안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며 세금 내고 살았다고 연금도 꼬박꼬박 나온다. 크지는 않지만 아담한 집에서 남편하고 큰 욕심 없이 조촐하게 살아가는 백수 생활이 너무 좋다. 지금은 여행을 멀리 갈 수 없는 상황이지만 코로나 19가 안정되면 국내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오래 살았지만 일하느라 가보지 못한 곳을 가보며 남은 여생을 즐기고 싶다. 차로 10분만 가도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숲이 있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여건이 허락하면 보지 못한 곳도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다녀 보면 좋을 것이다. 내일일은 모른다고 말하듯이 언제나 꿈은 꾸는 자만이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별 볼 일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지금 내 인생에 특별한 것은 굳이 필요 없다. 하늘 보고 땅을 보며, 바람이 불면 부나 보다, 비가 오면 오나보다 하며 살아간다. 정년퇴직을 하며 공식적인 백수가 되었으니 백수 생활을 누릴 것이다. 급할 것도 없고 서두를 것도 없다. 3년이 지났는데 앞으로 몇 년을 더 백수생활을 할지 모른다. 처음 이민을 왔을 때 기가 막혔던 삶을 생각하면 지금의 삶은 가보지 못한 천국의 삶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어도 못하고 직업도 없이 타국에 와서 까딱 잘못하면 길거리에 나와 앉아야 하는 현실이었다. 전례 없던 불황을 맞으며 앞이 깜깜하던 날들과 안개 낀 날처럼 앞을 볼 수 없던 시간들을 어떻게 지났는지 모른다. 나라에서 무료로 가르치는 영어를 배우고, 첫 직장을 잡았던 날부터 열일곱 살 아이들과 고등학교를 다니던 날이 생각난다.
세월이 흘러 지금이 되었다.(사진:이종숙)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모르면 바보처럼 그냥 웃고 넘어갔던 날들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악착같이 공부하고 살기 위해 노력했기에 오늘이 있다. 지금은 아무것도 두려울 것도, 무서울 것도 없다. 각자 나름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잘하면 좋겠지만 잘 못해도 떳떳하게 살면 된다. 기죽을 필요 없이 가슴을 활짝 피고 살면 된다. 이민자라고 서러워할 필요도 없고 남의 나라라고 뒤로 물러설 필요 없다. 다 같이 일하고 세금 내고 사는데 하나도 무서울 것 없다.세월이 흐른다고 사람이 근본적으로 변할 수는 없겠지만 배짱은 생긴다. 남들처럼 잘 못해도, 가진 것이 없어도 고개 숙이지 않는다. 법이 시키는 대로 살면 된다. 가지 말라는 길은 가지 않으면 된다.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의 능력을 인공지능은 상상외로 엄청나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이 무색한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세균이 침범한 세상은 그야말로 갈팡질팡이다.
인공지능이 지구를 점령하는 세상이 머지않아 올 것이다. 그것을 인간이 만들었지만 인공지능의 세계는 무한하다. 어쩌면 지금 누리고 있는 백수생활도 또 다른 모습으로 변형될지 모른다. 변화를 싫어하는 인간이지만 변화를 따라가는 인간이다. 옛날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날이 오기 전에 나는 오늘 나대로의 백수생활을 즐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