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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ng Sook Lee Oct 28. 2020

하늘 높고, 땅 넓은 것 아는... 지금이 좋다


(사진:이종숙)




"늙지 마라. 나이 먹지 마라..."


어느 날 엄마는 내 얼굴을 보시며 "나이 먹지 마라. 다른 건 먹어도 나이만큼은 먹지 마라".  하시며 내 고운 볼을 만지며 하시던 말씀이 생각이 난다. 곱던 엄마는 생전 늙지 않을 줄 알았는데 늙었다며 나에게는 나이를 먹지 말라고 하셨다. 그렇게 당부하셨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월을 따라가다 보니 그 무섭다는 나이라는 것을 먹었다. 어느새 이 나이를 먹었는지 모르겠다. 다른 좋은 먹을 것도 많은데 왜 하필 나이를 먹었는지 모르겠다. 안 먹어도 되는 나이를 먹고 늙어 가는지 모르겠다. 먹지 말라고, 먹으면 안 된다고 하는 나이를 왜 먹었는지 알 수가 없다. 나이 먹은 사람을 보면서도 왜 먹었는지 모른다. 그들의 주름이 좋아 보인 것도 아니고 그들의 굽은 어깨가 멋있어 보이지 않았건만 나도 모르게 공짜라고 주워 먹은 나이로 그들을 닮아간다.


주름이 많은 사람이 따로 있는 줄 알았다. 어깨 굽은 사람도 정해진 줄 알았다.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로 생각했는데 어느 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그들을 닮아간다. 얼굴에  없던 주름이 생겼고 눈꺼풀이 주저앉았다. 화장으로 조금씩 가려가며 살았다. 화장을 하니 보이지 않아 열심히 주름을 숨겨가며 젊은 사람인양 살았다. 길을 걸어가는 데 거울집 앞을 걸어가게 되었는데 거울에 얼굴은 나를 닮았는데 어깨가 굽어진 노인이 걸어갔다. 짝 놀라 다시 보니 나였다. 허리를 곧게 피고 어깨를 쫙 펴본다. 하지만 불편하다. 굽은 어깨가 흉하지만 편하다. 그대로 걷고 싶은 마음이지만 다시 펴고 자세를 고치며 앞으로 걸어갔다. 먹지 말라는 나이를 먹은 결과였다. 나름 위로하며 걷는다. '늙었는데 얼굴이 너무 빤빤해도 보기 안 좋아. 나이 든 늙은이가 허리가 너무 꼿꼿해도 노인 같지 않아 정이 안가.'  말도 안 되는 혼잣말을 하며 걷는다.


세상살이는 다 이유가 있고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는 말이 생각난다.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하고 살아온 인생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한다. 돈 안 주고 먹는 나이를 멋도 모르고 먹은 결과다. 하지만 사람이 나이를 먹는 게 아니고 세월이 사람을 데리고 다닌다. 태어나기 전에는 엄마 뱃속에서 엄마를 따라다니고 태어난 후부터는 세월과 함께 살아간다. 시간이 안 가고 세월이 빨리 갔으면 하던 것이 지금은 세월을 따라 가느라 숨이 차다. 남편과 나는 동갑내기다. 새파란 청춘에 만나 4년을 연애하고 결혼하여 42년을 살고 있다. 서로 안 세월이 4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새파란 청춘에 만나 중년을 보내고 노인이 되어 서로를 바라본다. 생전 늙지 않을 것 같았는데 하루하루 살다 보니 옛날의 모습은 하나도 없다. 어쩌다 옛날 사진을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이다.




(사진:이종숙)



몇 년 전에 인터넷으로 떠돌아다니는 동영상이 하나 있었다. 태아의 모습부터 유아기 성장기를 거쳐 청소년기를 지나 중년의 모습과 노년의 모습을 보내고 죽은 다음 뼈로 남겨진 인간의 변화하는 형태를 보여주는데 알아보지 못하는 모습이 보임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얼굴도 변하고, 표정도 변하고, 신체도 변한다. 살아온 삶의 질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이 흥미롭다. 걱정 없이 살아온 사람과 고생하며 살아온 사람이 다르고, 장소나 환경에 따라 다르다. 인간이 태어나 한평생 사는 동안 계절이 바뀌듯이 형편도, 환경도, 사정도 바뀌고 적응하며 살아간다. 용케 운이 좋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 해도 삶이 평탄하지 않을 수 있고 지지고 볶으면서 살아도 나름 행복할 수 있다. 사람이 나이를 먹지 않고 늙지 않는다면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하는 생각을 한다.


자연도 봄이 되면 온갖 꽃들이 피고 여름에 무성하다가 가을에 떨어지고 겨울을 맞아 휴식하다 다시 봄을 맞는 것처럼 인간도 당연히 나이 먹고 늙어야 한다. 갈 사람 가고 태어날 사람은 태어나 자라고 늙고 또 안식을 위해 죽는다. 먹지 말라는 나이를 먹어 노인이 되어 가을의 모습을 하고 살아가며 삶의 소중함을 느낀다. 영원히 젊을 것 같던 세월은 갔지만 지금의 나로서 행복하다. 얼굴에 주름이 있으면 어떻고, 등이 좀 굽으면 어떻고, 노쇠하여 행동이 굼뜨면 어떤가. 그동안 몇십 년 살면서 써온 육신이 달아 여기저기 아프고, 소화기능이 좀 떨어져 소화가 안 되는 것도  당연하다. 사람도 자연의 하나이고 오고 가는 자연처럼 순응하며 살아감이 옳다. 먹고 싶다고 먹어지는 나이도 아니고 안 먹는다고 비켜갈 나이도 아니다. 오히려 긴 세월 나와 함께한 세월에 감사하고 나이 들어 늙음이 내게 온 것에 감사한다.


천천히 남은 세월 살면 된다. 가을이 겨울을 걱정할 필요 없이 겨울은 때가 되면 온다. 가을을 살다 보면 자연히 겨울이 와서 휴식을 하게 됨을 안다. 가을은 가을이 해야 할 일을 충실히 하면 된다. 기억력도 저하되어 일일이 신경 쓰지 않고 살아도 된다. 힘든 일을 하지 않아도 되고 돈을 벌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지금이 좋다. 몇십 년 살았으니 인생이 무엇인지도 알았고 남은 인생 웃으며 살면 된다. 내가 나이를 안 먹었다면 지금도 나는 열심히 일을 해야 할 것이고 악착같이 돈을 벌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닐 것이다. 욕심이 많아서 이것저것 쌓아두고 살 것이고 내주장이 옳다고 싸우고 다투며 잘난 체할 것이다. 나이 들어감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순해지고 겸손해지고 힘든 사람 동정하고 아픈 사람 안타까워하며 인정 있게 살 수 있는 지금이 좋다.


하늘 높은 줄 알고 땅 넓은 줄 아는 지금이 좋다. 사람이 귀하고 소중함을 알아가는 지금이 훨씬 좋다.


 
(사진:이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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