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ong Sook Lee Nov 05. 2020

많이 사랑해서... 행복한 나날이었으면 합니다


(사진:이종숙)



봄을 기다리며 여름을 만났고 여름을 채 알기도 전에 여름과 이별을 해야 했다. 가을이 밀고 들어오니 힘 빠진 여름은 슬그머니 가버리고 가을이 자리를 잡고 예쁜 짓을 하니 혹하는 마음에 가을에게 마음을 빼앗긴 채 마음만 설레고 있다 보니 어느새 겨울이 다가온지도 몰랐다. 노느라고 정신 팔려 집안 살림은 못 본 척했더니 여기저기 신경 좀 써 달라며 살림이 누워있다. 옷은 옷대로, 책은 책대로, 가로세누워서 포개져 엎어지고 잦혀져 있다. 신발은 신발대로, 그릇은 그릇대로, 여기저기 쑤셔 박아 놓은 채 봄 여름 가을이 여전히 겹쳐있고 쌓여있다.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계절이 가듯이 나도 그들을 보내야 한다. 여름옷과 신발이 썰렁하게 걸려있다. 잠깐 다녀간 겨울 때문에 겨울은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서성이는데 아직도 떠난 계절을 보내지 못하고 바라만 볼 수는 없다. 겸사겸사해서 옷장을 또 들쑤시기 시작했다.


 앞으로 내가 더 날씬해지거나 멋있어질 확률은 전혀 없다. 지금껏 안 입던 옷들을 하나하나 입어본다. 앞으로 입을 수 없을 바엔 자리만 차지할 뿐 도움이 안 된다. 차곡차곡 개서 봉지에 담는다. 희망이 있어 놔뒀던 옷들인데 그 희망마저 없다. 사람이 늙고 옷도 늙고 세상도 늙는다. 아무리 좋은 것도 사람 따라 늙는다. 예뻐서 아끼던 옷 들이 더 이상 입을 수도 없고 입어서도 안된다. 한 번도 안 입은 것도 있고 몇 번밖에 안 입은 것도 걸려만 있은 지 오래다. 그나마 성당 갈 때 입으려고 걸어 놓았던 옷들도 올 한 해 코로나 때문에 한 번도 입지 않고 있다. 앞으로 몇 번을 입을지 모르지만 모든 게 짐이다. 외출도 만남도 없는 요즘 같은 때는 집에서도 좋은 옷을 입고 예쁘게 치장하며 살면 되는데도 그게 안된다. 안 입고 걸어만 두다가 안 맞으면 버리느니 집에서라도 입어야 할 텐데 편한 옷만 입는 다.


어차피 걸어놓았다 안 맞아 버리느니 버릴 때 버리더라도 한 번이라도 더 입고 버리는 게 낫겠다. 이제부터는 외출복이라고 특별히 놔두지 말고 입고 있어야 되겠다. 가만히 생각하면 하루하루가 특별한 날이고 소중한 날인데 내일로 미루며 살아오며 좋은 것들을 특별한 날을 위해 놔두었다. 오늘 내게 있는 지금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특별한 순간인데 아낄 것도 없고 기다릴 것도 없다. 보고 있기 위하여 사놓은 것도 아니고 내일이 있다는 보장도 없다. 지금부옷장에 걸어놓았던 옷들을 하나하나 매일매일 입어야겠다. 지금 입지 않으면 언젠가는 옷장에서 쓰레기통으로 갈 것이다. 아끼며 걸어놓았던 옷들은 비싼 돈을 들여서 산 것인데 고이 모셔 놓았다가 고스히 버리는 것은 너무 아깝다. 그 옷 하나하나 살 때 고민하며 샀던 생각이 난다.




(사진:이종숙)



나한테 어울릴까, 너무 비싼 건 아닐까, 얼마나 입으려고 거금을 투자하나, 하며 한 푼이라도 더 싸게 사려고 세일할 때 기다리며 샀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샀던 옷인데 걸어놓고 바라보다 버리려니 아까운 생각도 들지만 어차피 세상도 나도 옷도 세월 따라 늙어가니 지금이 입을 시간이다. 하나 둘 골라가며 정리를 하니 공간이 생긴다. 무엇이 있었는지 조차 몰랐는데 좋다. 아무리 좋아도 버려야 할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은 없다. 버릴 물건을 무겁게 등에 지고 사는 것과 같다. 여름에 그 많던 이파리를 가을이 되면 다 털어버리고 가벼운 모습이 되어 겨울을 맞는 계절에게 배우며 산다. 가을을 맞은 나도, 단풍처럼 아름다운 나도 어느 날 이파리를 다 털어야 한다. 미련 없이 남들처럼 다 털어 빈 가지로 가볍게 서있다가 겨울을 맞아야 한다. 우물쭈물하다가는 이파리를 털어내지 못한 체 얼은 이파리를 달고 추하게 겨울을 내야 한다.


예쁜 이파리가 좋다고 끼고 있다가는 다가오는 겨울을 알지 못해 흉하게 말라버린 이파리를 달고 겨우내 함께 살아야 한다. 지금껏 함께 살아온 살림살이를 버리는 게 쉽지 않다. 하지만 쓰지도 입지도 않는 것들과 함께 사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우리네 마음도 욕심을 버리면 감사와 사랑으로 채워지듯이 버리면 공간이라는 선물을 받는다. 공간은 우리에게 여유로움을 주고 편안함을 준다. 상살이 그 무엇도 공짜는 없다. 인간관계부터 살림살이까지 내가 한 만큼의 보상을 받는다. 힘든 노동 뒤에 편안한 삶이 있듯이 그냥 거저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일을 위한 계획과 생각을 가지고 살면서 차근차근 살아야 함을 알면서도 못하고 산다. 내일은 남의 것이 아니다. 생각보다 빨리 올 수도 있다. 이렇게 게으름을  피우며 살다가 내일이 내게 오면 나는 가을처럼 떠나야 한다. 올해의 나의 가을은 떠났고 다시는 내게 오지 않는다.


겨울이 지나고 새봄이 오면 그 새봄에 필요한 것들로 채우면 된다. 물질은 우리를 살아가는데 편리함을 주지만 영혼의 아름다움으로 부족함을 채우며 살면 된다. 이 세상의 모든 걱정과 근심은 마음으로부터 온다. 욕심이 낳은 자식들이다. 욕심을 버릴 때 걱정 근심도 사라진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로 욕심 없는 관계가 될 때  편안하게 된다. 가진 것을 빼앗으려 하고 기 질투가 생기면 미움이 자리를 잡게 되고 관계는 소원해진다. 그저 계절이 왔다 가듯 알게 모르게 맞고 보내야 한다. 올 것이 오고 갈 것이 가는 자연을 닮아야 한다. 세상 모든 것을 손에 잡으려 하지 말고 가슴으로 안아야 한다. 뜨겁게 사랑하며 겨울을 맞으면 아무리 추운 겨울도 견딜 수 있다. 얻기를 원했던 날들이 가고 있다. 버림으로 평화를 만날 수 있는 날들이 있음을 안다. 공간의 아름다움은 눈으로 볼 수 없는 마음에 있다.


쌓을수록 더높이 쌓기를 바랐는데 비우니 더 많이 비우고 싶다. 버리는 용기로 꽉 차 있던 옷장이 헐거워지고 내 마음도 덩달아 헐거워진다. 비워야 더 많이 담을 수 있는 그릇의 지혜를 배운다.


많이 가져서 행복한 것이 아니고 많이 사랑해서 행복한 나날이었으면 한다.



(사진:이종숙)


작가의 이전글 오늘 같은 날은... 클럽 하우스 샌드위치가 최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