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가을에 떨어지지 못한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하얗던 눈을 더럽혀 보기 싫다. 한동안 눈이 오지 않은 뜰은 떨어진 나뭇가지로 지저분하다. 며칠 전 심하게 불은 바람 때문에 간신히 달려있던 나뭇잎들이 몸부림을 치며 털어냈나 보다. 가을에 다른 나무들이 땅을 향할 때 게으름을 피우더니 갑자기 온 눈으로 시커멓게 얼어붙었다. 떨어지지 않고 버티던 이파리가 부지런한 겨울이 눈을 데리고 와서 그냥 얼은 채 눈 사례를 받았다. 나무가 가야 할 때를 놓치면 겨울을 내기 힘드는데 바람이 와서 떨어뜨렸다. 붙어있고 싶어도 새봄이 오면 새잎을 달아야 하는 나무이기에 언젠가는 떨어진다. 해마다 갑자기 찾아오는 겨울이 멀쩡하게 잘 있는 나무들을 얼려놓고 가는 바람에 나무들은 봄까지 얼어붙은 나뭇잎을 떨구지 못한 채 겨울을 내야 한다.
그런 나무들을 보고 있으면 어딘가 몸이 아파 힘들어하는 주위 사람들이 생각난다. 누구나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이지만 아픔에 시달리며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살다 간 지인이 생각난다. 평생을 자신은 뒷전에 두고 가족만을 위해 살면서 매일을 병마에 시달리다 말 년에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태어난 죄 밖에 없다'며 고통스러워하던 그녀는 아이 셋을 키우며 안 해 본일 없이 다 하며 살았다. 남편이 외국으로 돈을 벌러 간 이후로 시시 때때로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던 시어머니를 10년간 모시고 살았다. 며느리를 괴롭히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찾아내었고 그 행패는 남편이 이곳으로 온 뒤로 그녀가 아이 셋을 데리고 이민을 올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사람은 좋을 때도 있고 싫을 때도 있는 것인데 주야장천 매사를 트집을 잡고 괴롭히는 시어머니를 생각하면 몇십 년이 지나도 잊을 수가 없다던 그녀였다.
이민 온 뒤로 그녀는 온갖 노동을 하며 살았다. 그녀는 매일매일의 피곤한 삶에 지쳐갔다. 건물 청소를 하고 남편이 운영하는 작은 슈퍼에서 밤늦도록 일을 하고 나면 몸은 초주검이 되지만 아이들이 잘 자라 주기에 참을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시내에서 하던 사업을 그만두고 교외로 나가 조금 더 큰 사업을 하며 직장을 그만두었다. 생활이 조금씩 나아지고 아이들은 각자 살아가며 남편과 가게에서 일하는 재미로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삶의 행복을 느끼게 되었다. 틈틈이 시내에 와서 아이들을 만나고 생전 가보지 못하던 식당에 가서 외식도 했다. 무릎이 닳도록 일을 하고 싸구려 옷만 입으며 악착같이 돈을 벌며 살아온 지난날을 생각하며 이제 살만한 삶에 애착이 생겼다. 남편은 남편대로 틈틈이 좋아하는 것을 하며 취미생활을 하고 그녀도 친구들을 만나 수다도 떨며 하지 못했던 것을 하며 살 때 아들이 여자를 데리고 왔다.
죽은 나무가 손을 흔들며 인사한다.(사진:이종숙)
예쁘고 참한데 유학 온 아가씨라서 이곳 실정은 잘 모르지만 적응하면 될 거라며 결혼을 하겠다고 했다. 아들이 원하는데 말릴 이유도 없고 나이 들어가는 아들이 원하는 일이니까 결혼을 승낙하고 사업을 함께 하기로 했다. 아들은 가게에서 일을 하고 며느리는 아이를 낳고 집에서 육아를 맡아했다. 아들 며느리와 손주들과 가까이 살며 삶에 재마를 느끼며 살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 같은 손주들의 재롱을 보는 것도 잠깐이었다.아들 며느리가 아이들 교육문제로 시내로 이사를 나가게 되었다. 어차피 결국에는 나가야 하겠지만 서운함이 너무 많아 야속하기까지 했다. 아들 가족은 시내로 들어가고 결국 남편과 둘이 남아 일을 하며 살던 중에 남편이 높은 곳에서 일을 하다가 추락하는 바람에 크게 다쳤다. 병원을 오가고 남편은 조금씩 치매 증상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도시에 사는 아이들이 틈틈이 와서 도와주었지만 남편의 병이 깊어가 요양원에 들어가고 나니 그녀만 남게 되었다. 남편이 없는 사이에 아이들을 혼자 키우며 고된 시집살이를 하다가 이민 와서 고생만 하고 살았다. 살만하니까 육신은 늙고 남편은 병원에 있으니 커다란 사업체를 혼자 이끌어 가기가 너무 힘들었다. 아이들이 주말에 와서 번갈아 도와주고 가긴 했지만 직장생활을 하는 그들에게 너무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을 채용하여 가게를 이끌어 가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벌지 못했던 돈은 벌었지만 이미 몸은 병마가 찾아온 지 오래된 상태였다. 길어야 6개월이라는 의사의 말을 들으며 "열심히 살은 죄 밖에 없는데 어찌하여 이런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라며 울던 생각이 난다. "살만 하니까 죽게 되다니 태어난 게 무슨 죄라고 이토록 커다란 형벌을 받는지 모르겠다". 라던 그녀가 생각난다.
그녀는 그렇게 한 많은 인생을 끝내고 남편의 치매는 심해져서 부인이 죽었는지 조차 모른 채 요양원에서 오지 않는 아내를 기다리며 살았다. 잘 살아 보자며 이민까지 와서 고생만 하고 살다 결국 병마를 떨쳐 버리지 못한 채 떠나야 했던 그녀다. 사람이 사는 동안 아프기도 하고 고생도 하지만 그녀를 따라다니던 불행은 끝까지 그녀와 동반자가 되어 그녀를 데리고 갔다. 떨어지지 않은 채 나무에 얼어붙은 나뭇잎을 보며 힘들게 죽도록 고생만 하다가 간 그녀를 생각하면 너무나 허망하다. 고생하고 살다가 살 만하니까 병마 때문에 쓰러져간 그녀는 그녀의 말대로 태어난 게 무슨 죄인가?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을 때마다 나에게 와서 "열심히 산 죄 밖에 없어요". 라며 속마음을 털어놓던 그녀가 생각난다.하얗던 눈 위에 가을을 놓쳐버린 나뭇잎들이 여기저기 앉아서 지난가을을 이야기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황량한 겨울에도 여전히 떨어지고 쌓이며 봄을 향해 간다. 바람이 불어 어딘가로 데리고 가면 따라가고, 가는 길에 만나는 인연에 봄을 찾으며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