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속에서 맛있게 익은... 김장김치

by Chong Sook Lee


(사진:이종숙)


눈부신 겨울 아침이다.

뒤뜰에 서있는 마가목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눈부시다. 겨울 날씨 같지 않게 따뜻한 올해 겨울이 이대로 봄이 온다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기대를 해본다. 지난해 11월 중순에 40센티가 넘는 눈이 와서 겨울의 위엄을 보여주고 간 뒤로 눈이 별로 많이 오지 않고 12월을 보냈다. 숲 속은 여전히 하얀 눈으로 덮여 있지만 시내 도로에는 눈이 거의 없다. 아침을 먹으며 갑자기 내린 폭설로 아수라장이 되어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한국의 모습을 본다. 눈이 많이 오고 추운 이곳의 겨울에 살다 보니 폭설이 온다 해도 큰 걱정은 없이 살고 있지만 준비 없이 폭설을 맞은 고국을 생각하니 안타깝다.


겨울이 길고 혹독한 이곳은 겨울을 나는 게 커다란 숙제이다. 해마다 11월 중순에 엄청난 눈이 쏟아져 집집마다 눈으로 된 산을 하나씩 만들어놓고 겨울울 내야 한다. 단독주택에 사는 사람들은 각자 집 주위에 내린 눈을 치워야 하기 때문에 눈을 치우는 장비도 여러 개가 있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눈 치우는 기계 한 대와 대여섯 개의 삽과 두 개의 빗자루가 있다. 염화칼슘과 모래도 몇 포씩 사다 놓고 틈틈이 뿌린다. 갑자기 폭설 주의보가 나오면 아무래도 힘든 건 어디나 마찬가지이지만 그나마 이곳은 개인이나 국가가 모든 장비가 다 갖추어져 있기에 눈이 많이 와도 제설작업을 체계적으로 하기 때문에 특별한 불편은 없다. 해마다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눈 때문에 고생스러워도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을 생각하며 산다. 베란다에 놓아두었던 김장을 밤새 온 폭설이 덮어버렸던 몇십 년 전의 나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베란다가 자연 김치냉장고가 되었다.


눈이 많이 오는 이곳에서 오래 살다 보니 눈에 대한 추억도 많다. 오래전에 아파트에 살 때가 생각난다. 해마다 11월 11일 현충일 전후해서 김장이 도착하면 너도 나도 김장을 한다. 그 이후에는 눈이 많이 오고 춥기 때문에 미리 해놓고 마음 편하게 겨울을 맞는다. 그 해도 아이들하고 씨름을 하며 간신히 김장을 해서 여러 개의 통에 넣어 지붕 없는 난간 베란다에 나란히 놓아두었다. 김치 냉장고는 당연히 없던 시대이고 냉장고에 그 많은 것을 다 집어넣을 수 없기에 일단은 베란다에 놓아두고 하나씩 먹는다. 날씨가 추워지면 김치가 어니까 어쩔 수 없이 냉장고에 넣어야 하지만 그때까지는 베란다를 냉장고 대용으로 써야 한다. 11월에도 춥고 눈도 많이 오지만 그 해에는 다행히 유난히 날씨도 좋고 눈이 안 왔다. 겨울 양식을 준비해놓으니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베란다에 나란히 앉아 있는 김치통을 보며 김치가 맛있게 담아졌기를 기대하며 흐뭇한 마음으로 잠을 잤다. 그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해 있었다. 밤새 눈이 온 것이다. 그것도 엄청 많이 왔다. 무릎까지 덮여 넉넉히 30센티는 넘게 왔다. 걱정이 태산이지만 냉장고에 들어갈 자리가 전혀 없다. 어제 김장을 하면서 당장에 먹을 막김치와 깍두기를 한통씩 만들었고 동치미도 한통 만들어서 냉장고에 넣어놓았기 때문에 도통 자리를 만들 수 없다. 내가 담아 놓은 김치통들은 눈에 파묻혀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어쩔 수 없다. 이리 버리나 저리 버리나 어차피 해결방법이 없다. 그냥 눈 밑에서 죽이 되던 밥이 되던 그냥 놔둘 수밖에 없다. 김치가 얼어도 할 수 없고 골아도 할 수 없으니 그냥 놔두기로 했다.



(사진:이종숙)


그렇게 한 달 정도가 지나고 냉장고에 있던 김치를 먹으며 자리가 생겼다. 어떤 모습일까 생각하며 눈밑에서 잠자고 있는 김치통을 하나 꺼내 가지고 열어 보았다. 기적 같은 일이 눈에 보인다. 빨갛게 잘 익은 배추김치가 먹어 달라고 나를 쳐다본다. 색상도 곱고 냄새도 기가 막히게 잘 익었다. 눈밑에서 숙성된 김장김치는 냉장고에서 익은 김치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맛있게 익어있었다. 냉장고는 자주 여닫기 때문에 쉽게 쉬는데 베란다가 자연 김치냉장고가 되었던 것이다. 한 달 동안 한 번도 열지 않고 자연적으로 익어서 그야말로 너무나 맛있게 익어 있었다. 남들은 김치가 너무 익어 다시 담아야 한다고 걱정할 때 나는 베란다에서 김치를 하나씩 빼먹었다. 눈 쌓인 김치통을 바라보며 한숨지었는데 결과는 정말 반대였다.


마침 새로 이민 온 친구가 적응을 하기 힘들어서 쩔쩔매고 있었는데 자연적으로 잘 숙성된 내 김치를 한통 주었더니 먹고 나서 너무나 맛있어서 향수병이 다 없어졌다고 오래도록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눈이 많이 와서 고생하는 고국의 뉴스를 보며 지나간 날들이 생각나는 날이다. 그때의 맛있는 김치 맛을 잊을 수 없다. 어찌 그리도 맛있었는지 생각할수록 신기하다. 땅에라도 묻은 것 같은 김치 맛이라 그 뒤로도 은근히 김장 후에 밤새 많은 눈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그 후로는 그런 일이 두 번 다시없었고 생각지 못한 자연 냉장고로 톡톡히 덕을 본 해였다.




한파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실외에 있는 선별 진료소에서 손발이 시려 쩔쩔매며 핫팩을 손에 쥐고 옷을 몇 개씩 껴입어도 춥다는 의료진들이 고생한다. 많은 분들이 추위로 힘들어하여 안타까워도 이미 내린 눈이 녹을 때 까지는 고통을 감수하며 넘기는 수밖에 없다. 갑자기 당하는 일은 언제나 견딜 수 없어 고통스럽고 참기 어렵다.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생명을 내놓고 일을 해야 하는 배달원들의 고충도 가슴이 아프다. 바닷물까지 얼을 정도로 추우니 할 말이 없다. 생선이 냉동생선이 되고 펄펄 끓는 커피와 라면이 몇 분 만에 꽁꽁 얼어붙은 모습에 얼마나 추운지 상상이 간다. 어서 빨리 날씨가 좋아져서 추운 날씨에 길거리를 지키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고충을 덜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


시간은 지나간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혹독한 이 겨울이 지나가면 꽃 피고 새 우는 봄이 오리라는 희망을 하며 살아간다. 삶은 어차피 오고 가는 계절을 닮았으니 이미 온 것은 가고 언젠가 새것이 온다.


(사진:이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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