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어가는 가을

by Chong Sook Lee



가을이 익어간다. 노랗고 빨갛게 익어가는 가을을 보고 있으면 아직도 설레는 마음으로 가슴이 뛴다.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찐다는 천고마비의 계절이 여물어 가고 단풍이 곱게 들어가는 나무들이 밖으로 유혹한다. 올해는 우리 집 앞의 자작나무가 노란잎으로 가을을 만끽하며 정정하게 우리 집을 지키고 서 있다. 몇 년 전 9월 말에도 올해처럼 노랗게 단풍이 들어 있었는데 그다음 날 하루 종일 계속 비가 내려 그 예쁘던 나뭇잎이 하루 만에 다 떨어져 버렸던 기억이 난다. 이곳의 가을은 8월부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종 8월에도 눈이 온 해도 있고, 작년에는 9월 초에 눈이 와서 가을 없이 겨울로 바로 넘어가 버렸다. 무덥던 고국의 여름과 달리 안 그래도 짧은 이것의 여름에 57일간 비가 와서 서늘한 여름이었다. 여름 내내 거의 매일 비가 온 셈이지만 다행히 가을이 길어 아름다운 단풍을 즐길 수 있다.


오늘은 계곡을 끼고 있는 숲으로 산책을 나갔다. 날씨가 좋아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산책을 한다. 며칠 전 불어대던 비바람으로 나무에 있던 많은 잎들이 떨어져 산책길을 덮었다.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밟으며 숲 속 깊이 발길을 옮긴다. 숲에 꽉 찬 나무들로 여름에는 볼 수 없었던 하늘이 나뭇잎을 다 털어버리고 서 있는 나무 꼭대기로 숲이 훤히 보인다. 하늘이 파란 물감을 뿌려 놓은 듯이 파랗다. 금방이라도 파란 물감이 떨어질 듯하다. 벌써 여러 나무들이 나목이 되어 겨울의 모습을 드러내고 서 있다. 연인들의 모습도 보이고 가족들의 행렬도 보인다. 변덕스러운 날씨에 행여 가을을 놓치기 라도 할까 봐 나들이를 나온 모양이다. 다람쥐들도 부지런히 무언가를 집어다 나르고 있고 새들도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겨울을 위해 체력증강을 하고 있나 보다.


점심을 먹고 앉아 있으면 사르르 잠이 와 낮잠을 즐기는 시간에 그대로 있으면 잠이나 자며 아까운 하루를 보낼 것 같아 서둘러 나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들어 게으름이 심해져서 만사가 귀찮아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어서 그런지 기운이 점점 떨어진다. 늙어가는 현상이라 받아들이다 보니 하루 이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세월만 까먹는 것 같았는데 유혹하는 가을에 못 이기는 척하며 슬그머니 홀려서 나오니 정말 좋다. 걷다 보니 삼거리가 나왔다. 몇 번을 온 곳이지만 올 때마다 새롭다. 오늘은 왼쪽으로 걸어본다. 길이 가파르지만 옆으로 깊은 계곡이 참 멋있다. 계곡으로 물이 흐르고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옆에는 깊은 절벽을 이룬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탄성을 지르며 흐르는 물을 구경하고 다시 비탈길을 올랐다.


바로 언덕 넘어 동네가 보이는 것을 보고 돌아오다 보니 예쁜 꽃이 꽂혀있는 벤치가 보였다. 가까이 가 보니 십여 년 살고 간 사람의 위령 의자였다. 산책하는 사람들이 힘들면 쉬고 가라고 가족들이 설치해 놓은 의자였다. 알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명복을 빌며 감사한 마음을 전해 본다. 삼거리에서 또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그곳에는 크고 작은 백양나무 숲이 이어져 있다. 가을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나뭇잎들이 흔들리며 숲의 정적을 깬다. 숲이 시끌벅적하다. 세상 사람들이 대화를 하듯이 숲 속의 자연들도 나름대로 대화를 하나보다. 숲길을 걸으면 숲의 수다가 들려온다. 바람소리, 나뭇잎들이 흔들리며 부딪히는 소리, 흐르는 물소리, 나뭇가지 꺾어지는 소리 등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숲들도 인간 세상 못지않게 의견이 분분한가 보다. 뽀얀 나무들이 뿜어내는 산소로 새로운 에너지를 공급받는 것 같다.


여기저기 쓰러진 나무에 이름 모를 버섯이 자라고 군데군데 빨갛고 노란 열매들이 눈길을 끈다. 이렇게 나와서 산속을 걸으면 걱정 근심이 다 사라진다. 세상만사가 다 아름다워 보이기 때문에 숲을 찾는 이유 중 하나다. 욕심을 내려놓고 자연을 보고 있으면 순응하며 살아가는 자연을 닮아갈 것 같아 좋다. 늦가을의 산행은 사람을 겸손하게 한다. 때가 되면 오고 가는 자연처럼 믿고 따르며 순명하는 마음을 가지고 싶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집을 향한다. 혹시 날씨가 추워 산책길에서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나 하는 우려는 온데간데없이 기분이 상쾌하다. 오늘이 올 가을의 마지막 날이라 해도 서운해하지 않고 오는 겨울을 반갑게 맞이하는 나무들처럼 살아가자는 생각을 해 본다.


(사진:이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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