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렇게 시작했다

by Chong Sook Lee


마음에 꽃을 피웁니다 (그림 : 이종숙)

얼마 전 집안 청소를 하다가 아이들이 사다 놓고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새 캔버스 하나를 찾았다.
그림을 한 번도 그려 보지 않았지만 새하얀 캔버스를 보니 무언가가 그리고 싶어 졌다. 물감도 붓도 없는데 마침 빨간색과 검은색의 매직펜이 눈에 띄었다. 무엇을 그릴까 생각하다 매화를 그리기로 하고 우선 검은색으로 나뭇가지를 그리고 가지에 빨간색으로 매화꽃을 그렸다. 그럴듯해 보인다. 생전 처음 그린 매화꽃을 벽에 걸어 놓고 남편에게 자랑을 했다. 남편도 깜짝 놀라 신기해서 어쩔 줄 몰라하더니 사진을 찍어서 아이들에게 보냈다. 아이들 역시 깜짝 놀라는 기색이다.

평생 동안 엄마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매화꽃을 그리다니 그것도 붓과 물감이 아니고 매직펜으로 말이다. 그 일이 있은 후 몇 달이 지나 크리스마스가 되어 아이들은 그림물감과 붓 그리고 캔버스가 들어 있는 그림 세트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내게 주었다. 그러나 그림에 대해 문외한인 나는 감히 만지지도 못한 채 책상 위에 놓아두고 잊고 있던 중 어느 날 문득 그림을 그려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이것저것을 만져보고 물감을 짜서 붓으로 하얀 캔버스를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이라서 머리로 생각하며 붓으로 그리는데 물감에 대한 상식이 없는 나로서는 제대로 된 그림이 나올 리 만무였다. 그래도 하나 둘 색을 입혀 가며 그림 하나를 끝내고 보니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정년퇴직을 한 나이인 지금에 와서 미술학원에 간다는 것도 그렇고 해서 유튜브에 들어가 보니 초급자를 위한 그림 교습이 생각보다 많고 의외로 잘 가르쳤다. 그래서 시간 날 때마다 배우고 실습하고 응용하여 지금은 조금씩 그림이 눈에 들어와 취미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캔버스를 발견한 덕에 취미 하나를 더 갖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평생 동안 세 아이를 키우고 직장생활을 하며 나를 위한 시간을 갖지 못하고 살았는데 지금이라도 그림을 그리며 소일할 수 있음에 행복하다. 꽃을 그리고 나무를 그린다. 바다를 그리고 산을 그린다. 하늘과 바다를 그리고 숲과 계곡을 그린다. 머릿속의 상상은 날개를 펴고 페인트와 붓은 하나가 되어 하얀 캔버스를 물들인다. 그러다 보면 나는 자연에 안겨 숲을 걷고 해변가를 걷는다. 인생의 꿈을 그리며 나는 행복하다.


좋아하는 무언가를 하면서 살아갈 때 사람들은 삶에 의욕이 있고 보람되며 희망이 넘치게 된다. 남편도 아이들도 아낌없는 응원을 해 주니 나름대로 자신감도 생기니 마음이 젊어지는 기분이다. 아직은 아마추어에 불과하지만 화폭을 메꾸어 나가며 창작을 하니 시간이 지루하지 않을뿐더러 내게 주어진 시간의 귀중함을 새삼 느낀다. 한번 가면 내게 오지 않을 나의 소중한 시간을 심심하다는 이유로 낭비한 지난날이 후회가 된다. 그림을 그리게 되니 세상은 너무나도 아름답다. 무심히 넘겨 버렸던 자연의 모습, 여러 모습의 나무들과 색과 모양이 다른 나뭇잎, 아름다운 꽃들의 모습이 그냥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우리 집은 마치 작은 미술관 같다. 사방이 전부 내가 그린 그림으로 도배가 되어있다. 처음에 그린 그림 몇 개를 남편 생일에 '깜짝 선물'로 주려고 지하실 한쪽, 안 보이는 곳에 놓았는데 남편이 무언가를 찾으러 내려가서 들켰다. 그 후 남편은 '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그림' 이라며 벽에 걸어놓아 오랜만에 우리를 방문하는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일부러 미술 전시회는 자주 갈 수 없지만 이렇게 가까이 여러 점의 그림을 볼 수 있어서 참 좋아한다. 마루에 꽃피는 봄과 푸르른 여름, 그리고 단풍나무 숲과 눈 쌓인 들판을 바라보며 상상 속에 피어나는 곳을 그리며 삶의 희로애락을 함께한다.


삶에도 밝음과 어둠이 있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어 아름다운 것처럼 그림에도 명암과 원근의 조화가 함께 어우러질 때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 길을 걸으면서 눈에 들어오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다음에 그리게 될 그림을 생각하게 되고, 그림을 그리며 내 마음을 표현하는 순간들은 살아가는 또 다른 의미가 되었다.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동기는 아주 작아 스쳐 지나치는 바람에 불과하겠지만 그 작고 보잘것없는 것을 정성 들여 다듬을 때 그 보이지 않는 것이 우리의 삶에 커다란 기쁨이 되어 돌아온다.


그림, 그렇게 그리기 시작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감춘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