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바람도, 눈보라도... 모두 세상에 필요하다

by Chong Sook Lee


거리두기와 마스크를 한 코로나시대의 눈사람(사진:이종숙)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하얀 눈이 세상을 덮었다. 며칠 날씨가 포근하여 봄이 오려나 생각했는데 꿈도 야무지다고 놀리는 듯 밤새 눈이 왔다. 세상은 봄이 왔다고 들썩이는데 이곳만은 겨울의 한가운데에 있다. 아직은 아니라며 심술을 부리는 겨울이지만 어느 날 힘없이 녹아내리며 봄에게 자리를 내주고 떠날 것이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겠지만 다음 겨울도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생각하고 싶지 않고 꽃 피고 새 우는 예쁜 봄만 생각하고 싶다. 내일을 걱정하느라 오늘을 모른 체하고 살아왔는데 이젠 오늘만 생각해도 시간이 짧고 게으름을 피울 시간이 없다. 어영부영하다 보면 하루가 가고 한 달이 가고 달아나는 세월을 쫓아가기가 숨이 차다. 그래도 천천히 걷다 보면 세월을 만날 수 있으리라. 강가에 의자 세 개가 나란히 앉아 있다. 여름 같으면 의자에 누군가가 앉아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을 텐데 빈 의자만 쓸쓸하게 얼은 강을 바라보고 있다.


날씨가 쌀쌀하지만 가까운 곳으로 산책을 나가 걸어본다. 어젯밤에 온 눈이 숲을 하얗게 덮어 다시 겨울로 돌아간 듯하다. 코끝이 시리지만 바람은 상쾌하다. 눈 아래 보이지 않는 얼음이 여기저기 숨어 있어 조심하지 않으면 아주 위험하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서 사람들이 없어 남편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걸어간다. 멀리 사는 아이들이 보고 싶고 손주들의 재롱도 보고 싶다. 이때나 저때나 코로나가 끝나기를 고대하며 기다린 세월이 오고 간다. 겉으로 보기에는 강도 아직 꽁꽁 얼어있고 나무들은 낡은 이파리들을 다 떨어뜨리고 알몸으로 서 있다. 이제 봄이 가까이 다가 오기에 새 잎을 달 준비로 바쁘다. 가까이 가보니 가지마다 조그맣게 움이 트기 시작했다.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봄은 온 지 오래인가 본데 손으로 만져지지 않는다고, 귀로 들리지 않는다고 마냥 기다린다.


속으로 익어가며 피어나는 생명을 알아채지 못하고 기다리며 살다가 떠난 뒤에 그리워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다. 한때 친하던 사람들이 이유도 모른 채 서먹해지며 돌아서게 된다. 살다 보면 좋은 날도 있고 서운한 날도 있는데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혼자 삐지는 사람들을 어찌할 수 없다. 어느 날 마음이 풀어지면 이미 때는 늦어 멀어진 사이가 되는 것을 알지 못한다. 세상에 앞서고 뒤서며 태어나서 세상 구경하다가 너도 나도 가야 하는 인생살이 좋게 좋게 넘어가면 좋을 텐데 그렇지 않다. 조금만 서운해도 등을 지고, 조금만 소홀해도 변하는 인간의 마음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 군데서 이웃과 더불어 사는 나무들이 참으로 보기 좋다. 바람이 불면 서로 바람을 막아주는 그들처럼 우리도 살았으면 좋겠다. 한치의 양보도 없이 이겨야 하고 잘나야 하는 인간의 모순 속에 끼리끼리 몰려다니며 서로를 이용하며 살아가는 인간이다. 조금의 손해도 용납하지 않는 세상을 떠나 숲 속에서 살아가는 나무들을 닮고 싶다.





어제 뉴스에 어느 남자가 한쪽이 녹은 강가의 얼음 위를 걷다가 얼음이 깨져 강물에 빠지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녹지 않은 듯 보이는 얼음이 부서지면서 물속으로 몸이 들어가고 간신히 구조대원이 구해주어 살아났는데 정말 조심해야 한다. 해마다 해동하는 이 시기에는 들어가지 말라는 팻말을 무시하고 사람들이 들어가서 사고가 난다. 가지 말라는 곳을 굳이 갈 필요 없는데 결국 한순간의 잘못된 생각이 대형사고를 친 것이다. 떨어지고, 빠지고, 차에 치고, 하는 사고가 연일 끊임없이 일어나는 세상인데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은 하지 말라면 하지 말고 사는 길 밖에 없다. 넓게 펼쳐진 강가 건너편 꼭대기에 집 몇 채가 나란히 강 쪽을 향해 있다. 앞으로 쭉 나 있는 길을 따라 걸어본다. 나무들도 겨우내 더 많이 자란 듯 길쭉길쭉하게 하늘을 향해 서 있다. 법도 없고 지키는 사람도 없는 숲 속은 언제나 질서 정연하다.


누군가 걸어놓은 새집에 먹이를 먹으러 새들이 오고 가며 나무 꼭대기에서 까마귀 한 마리가 앉아서 짝을 부른다. 나무 사이로 다람쥐들이 쉬지 않고 오르내리는 것을 보니 봄이 살그머니 온 것을 나만 모르고 있었다. 행복은 이렇게 아무도 모르게 함께한다. 행복이 봄처럼 곁에 와 있는지도 모르고 봄을 기다리듯이 행복을 찾으려 한다. 자연은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아무 때나 찾아오라고 하는데 살기에 바쁜 사람들은 무시하고 나중으로 미룬다. 자연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행복을 안겨주는데 그 마음을 모른 채 한다. 사시사철 기다리며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놓으시는 부모님의 마음 같은 자연이다. 돌아가시고 더 이상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아도 가슴속에서 끊임없이 격려와 용기를 주는 부모님과 같다. 한 군데에서 자라고 늙어 쓰러지는 날까지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나무들을 보면 한 사람의 인생을 보는 듯 마음이 짠해온다.



(사진:이종숙)


가다 보니 길 가운데 몇백 년도 더 되어 보이는 나무 하나가 버티고 서 있다. 여러 번 지나치면서 만났던 나무인데 오늘은 유난히 더 웅장해 보인다. 비바람 속에서도 그 자리를 지키고 눈보라에도 넘어지지 않고 서 있는 나무가 믿음직해 보인다. 사람 같으면 조금만 괴로워도 죽겠다고 할 텐데 아무런 불평 없이 자리를 지키는 나무를 보며 또 한수 배우고 간다. 여름에는 그늘을 주고 겨울에는 바람막이가 되어 동네를 지켜준다. 어느 날 힘을 다하고 수를 다하는 날 쓰러지면 장작이 되고 의자나 가구가 되어 다시 태어난다. 구불구불한 산책길을 걸어보면 우리네 인생이 보인다. 오르고 내리며 눈이나 비가 와도 걸어야 하는 인생길이 숲 속의 오솔길에 있다. 싫다고 주저앉을 수 없고 아프다고 죽을 수도 없다. 고난을 헤치고 살아야 한다. 피할 수도 없고 물려달라고 할 수도 없다. 길을 따라 걸으며 살아야 한다.


가는 길에 누구를 만나도 영원히 같이 가지는 않는다. 잠깐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같은 인연이다. 잠깐 만나서 살아가는 인생길에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도 나를 시시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다 귀하다. 꽃바람도 좋고 눈보라도 좋다. 모든 것들이 세상을 살아가게 한다.


(사진:이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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