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기다리고 있는데 다시 눈이 와서 뜰을 하얗게 덮는다. 아직은 겨울이 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며칠 따뜻했다고 눈까지 뿌리는 날씨가 원망스럽다. 그까짓 눈이 온다고 오던 봄이 돌아서 가지 않지만 가기 싫어하며 심술부리는 겨울이 야속하다. 꽃잔치를 하는 한국에서 보내오는 꽃 사진들을 보며 어서 이곳에도 봄이 빨리 오기를 고대하는데 내 마음을 몰라준다. 눈이 오거나 말거나 내 할 일 하면 언젠가 봄이 제 발로 걸어올 텐데 참을성 없는 나는 안달이다. 아침에 하나 둘 힘없이 내리던 눈발이 굵어지고 어제 보았던 봄은 하룻밤 사이에 겨울이 되었다. 오늘은 집안에서 둥글둥글 놀면서 벌렁 누워본다. 나를 기다리는 물건들이 여기저기 쌓여가지만 무시하고 천장을 본다. 이곳에 이사 온 지 32년째다. 처음에 아파트에서 이 집으로 이사 왔을 때는 살림이 별로 없었는데 하나 들 사다 보니 집안으로 살림이 꽉 차있다.
필요해서 사서 그동안 잘 써 왔는데 지금은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것들이 많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갈 수 있는 물건들을 보면 괜히 마음이 심란하다. 물건을 보면 다 없애버리고 싶은데 차일피일 미루고 없애지 못하고 사는 게 짜증이 난다. 서랍 속에 물건들을 차곡차곡 쌓아놓고 건드리지도 않은지 오래되었다. 정리를 했지만 쓰지도 않으며 언젠가를 위해 모셔두고 산다. 새로운 것들이 무섭게 쏟아져 나오는 세상인데 아무리 새것이라도 유행이 지난 물건은 쓰레기나 다름없다. 복고풍이 되어 다시 돌아오는 유행도 있지만 여전히 무언가 다르게 나온다. 옛날에는 물려 입고 살았지만 지금 은 아니다. 나가지 않아도 물건을 사고 배달이 되는 세상이니 쌓아놓을 필요가 없다. 일 년 동안 쓰지 않은 물건들은 앞으로도 쓰지 않을 것이다.
사려면 많은 돈이 필요하지만 자리만 차지하는 쓰던 물건은 돈 주고 버리는 세상이 되어간다. 늦었지만 쓰레기 분리수거가 시작된다고 하니 버릴 것 버려야 한다. 각자 정해진 쓰레기 양이 있는데 더 많이 버리기는 쉽지 않다. 쓰레기라는 것은 더러운 것만이 아니고 필요 없고 사용하지 않으며 아까워서 못 버리는 것이 다 쓰레기다. 종이 한 장도 아까워서 뒤면을 잘라서 노트로 쓰던 세상이 아니다. 옷감이고 종이고 넘친다. 재택근무로 사무실 빌딩이 아파트로 전환되는 세상이다. 물건은 사는 순간 중고가 되어 아무리 새것으로 보관을 잘했다 하더라도 새것은 아니다. 비싼 돈을 주고 샀어도 그동안 사용한 것을 생각하면 본전을 빼고도 남을 만큼 썼으니 필요 없고 쓰지 않는 물건으로 집안을 채우지 말아야 하는데 잘 안된다. 그래도 하나 둘 정리하다 보면 안 한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사진:이종숙)
아이들 어렸을 때 찍은 사진들이 앨범에 고이 간직되어 있다. 이제는 아이들이 분가를 하고 아이들 사진을 가져가라고 있더니 사진들은 엄마 아빠의 추억이니까 안 가져간단다. 가버린 어릴 적 사진을 뭐하러 가져가느냐고 하며 필요 없단다. 사실 우리도 필요 없기는 마찬가지다. 어쩌다 한번 생각날 때 들여다보던 사진들인데 손주들이 태어난 후로는 손주들 사진을 보느라 아이들 사진은 관심이 없다. 더구나 보기 편리한 스마트폰에 저장된 사진도 지나간 사진은 보지 않는데 몇십 년 된 앨범을 보게 되지 않는다. 옛날 학창 시절 앨범은 사진을 빼어 정리를 했더니 얼마 되지 않는다. 어차피 아이들이 가져가지 않을 사진이라면 자리만 차지하는 앨범에서 사진만 빼서 보관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아이들 어릴 적 쓰던 책상도 옛날 커피 테이블도 다 버려야 하는데 아무 이상 없는 것을 버리고 사기는 어중간한 나이라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집안이 우중충하다. 무슨 일이든지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으면 아무것도 못한다. 아이들은 물건을 잘도 사고 잘도 바꾼다. 중고로 팔기도 잘하고 싫증 나면 결심하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 없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가라지 세일을 하며 물건을 처리했는데 지금은 그도 저도 다 귀찮아 필요 없는 물건은 중고가게에 가져다주고 만다. 큰돈도 안되는데 파는 것도 힘들고 복잡하여 그냥 없애는 게 제일 편하다. 지금 귀찮다고 미루다 보면 더 힘들어진다. 기운 있고 정신 있을 때 보관할 것 보관하고 버릴 것 버리고 줄 것 주어야지 안 그러면 큰일 난다. 이민 역사가 갈어지니까 주위에 어른들이 하나둘 요양원으로 들어간다.
그분들도 아까워서 버리지 못하고 하루하루 미루다 시간을 놓친 채 집을 떠나는 모습을 본다. 갑자기 아프거나 혼자 살기 힘들어지면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한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시간이 있기 마련인데 자칫 생각 잘못하면 아까운 시간이 가버린다. 세상에서 가장 아깝고 소중한 것은 물건이 아니고 시간이다. 가버리면 다시 못 올 시간을 귀찮다고 그냥 보내는 것이 제일 어리석음을 알면서도 그냥 보낸다. 소중한 것은 보이지 않고 조용히 왔다 가는 세월이고 넓게 쓸 수 있는 공간이다. 하나하나 필요해서 샀듯이 필요 없는 것들은 하나하나 없애야 한다. 살던 집을 팔고 콘도를 사서 이사를 간 사람이 갑자기 아파서 요양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콘도가 팔리지는 않고 매달 나가는 유지비를 자식들이 부담해야 하는 일이 생기는 것을 보니 남의 일 같지 않아 괜히 마음이 조급해진다.
평소에 가까이 오고 가던 할머니가 있었다. 아들 하나가 있는데 죽은 다음에 아들이 힘들까 봐 쓰레기 하나 없이 완벽하게 준비를 하고 살았는데 그분이 떠난 후에 할 일이 태산 같다던 아들의 말이 생각난다. 부모는 아이들을 위해 못하는 것이 없는데 아이들은 부모를 위한 작은 일도 힘들어한다. 아무리 정리를 잘해도 할 일은 남지만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 나이가 들면 소유를 줄여야 한다는 말이 실감 난다.
내가 가진 것은 내 몸 하나면 족하다. 어느 날 떠나는 날에 옷 한 벌 걸치고 훌훌 날아가면 된다. 눈 오는 바깥을 쳐다보며 망상에 젖어 별 생각을 다한다. 사람이 사는 한 완벽한 정리는 불가능하니 매일매일 조금씩이라도 마음을 비워보자. 어느 날 아까운 마음도, 미련도 없어지는 날이 오리라.